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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헤이트풀8. 정점으로 치닫는 타란티노 세계관으로 비추어본 미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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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고 있는 감독 중에서 가장 자기 색깔이 확고한 작가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쿠엔틴 타란티노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려지지 않을까. 굳이 지난 7일 국내 개봉한 <헤이트풀8>의 기본 시놉시스를 모르고 보러간다고 해도,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짐작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여전했고, <헤이트폴8>은 타란티노의 독특한 색채가 정점에 달한 그만의 영화이다. 





<헤이트풀8>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려 8명 이다. 그 외에 몇 명의 인물들이 추가로 등장 하는데, 짧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인물들 조차 결코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한꺼번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엎치락뒤치락 혈전을 벌인다는 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타란티노의 데뷔작이며 출세작 <저수지의 개들>이 연상된다. 다만 <헤이트풀8>가 <저수지의 개들>을 포함 타란티노의 전작들과 큰 차별점을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아가사 크리스티 식의 추리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란티노 영화의 인물들은 말이 참 많다. <헤이트풀8>의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에 육박하는 것도, 쉴새 없이 말을 주고 받는 캐릭터들의 수다스러움에 있겠다. 하지만 167분이라는 러닝타임의 압박과 장황하게 이어지는 대사에도 불구, <헤이트풀8>은 지루할 틈이 없이 흘러간다. 다음 장면에 대한 끊임없는 궁금증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결코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이야기를 펼쳐나가며, 만족스러운 매듭을 짓는다. 





도저히 몇 줄의 문장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러하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장교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워렌(사무엘 L. 잭슨 분)은 그와 비슷한 처지인 교수형 집행인(커트 러셀 분)이 타고 있는 마차에 우연히 탑승하게 된다. 그 안에는 교수형 집행인이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서 잡은 여죄수(제니퍼 제이슨 리 분)이 함께 타고 있었고, 그 이후 남부군 게릴라 부대를 이끈 우두머리의 아들이기도 한, 보안관(윌튼 고긴스 분)이 동승하여, 아슬아슬한 여행을 이어나간다. 


이윽고, 거친 눈보라를 피해 한 산장으로 들어선 이들은 그곳에 먼저 와있던 또다른 4명, 과거 남부군으로 활동했던 퇴역장교와 교수형 집행자, 카우보이, 멕시코 출신 이방인들과 합류한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영화가 그렇듯이, 그들의 우연한 만남은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총으로 시작해서 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수많은 총기사건이 일어나도, 총기 규제가 쉽지 않은 미국의 압축판 이기도 하다. 1600년대 영국인들이 대거 현 미국 동부부 연안에 자리잡은 이후,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동했던 미국의 역사는 곧 개척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 때 미국 영화의 대부분을 장식 했던 카우보이들의 서부극이 인기를 끌은 것도, 선조들이 총 하나로 이룬 서부 개척사를 기념 하고 싶었던 후손들의 욕망이 빚어낸 기록이었다. 


미국 남부 테네시주에서 태어나 줄곧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타란티노가 본격적으로 서부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고는 놀랍게도 흑인이었다. 장고 하면 금발의 백인을 떠올린 사람들에게 흑인 장고의 탄생은 그야말로 금기를 깨트린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타란티노는 한 술 더 떠 <헤이트풀8>에는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응징하는 흑인 현상금 사냥꾼이 등장한다. 





그런데 <헤이트풀8>에는 인종차별주의자를 향한 워렌의 증오심 외에도, 주인공 각각의 적개심과 증오가 얽히고 설키며, 도무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혈전으로 치닫게 된다. 여기서 흑인 현상금 사냥꾼 외에도 타란티노의 서부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8명의 주인공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자 거친 남성들 사이에서도 기괴한 행동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죄수의 존재감이다. 기존의 서부극에서는 언제나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흑인과 여성의 대두는 여전히 은연중에 지속되는 인종, 여성 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흑인 대통령에 이어 첫 여성 대통령이 나올 지 모른다는 미국의 달라진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일명 이소룡 패션이라는 노랑 트레이닝복을 입고 처절한 복수를 감행하는 여전사(<킬빌>), 흑인 장고, 흑인 현상금 사냥꾼과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여죄수까지. 쿠엔틴 타란티노의 캐릭터들은 언제나 사회의 통념을 뛰어넘는 통쾌한 한 방을 보여 준다. 물론 타란티노의 초창기 영화 <저수지의 개들>로 돌아간 듯한, <헤이트풀8>에는 좋은 놈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들만 존재할 뿐이다. 뭔가를 향해 노골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오로지 이들 앞에는 살아 남아야한다는 본능만 남는다. 그럼에도 나쁜 놈들 사이에서도 결코 어겨서는 안될 룰이 있었고, 그 규정을 어길 시에는 어김없이 잔혹한 대가가 뒤따른다. 타란티노식 복수의 모든 것이 담겨진 이 영화의 엔딩이 진한 설득력을 가져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잔인한 시각적 효과가 앞서는 타란티노의 영화 특성상, 그 폭력성이 영화 전면에 도사리고 있는 <헤이트풀8>은 당연히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잔인한 장면을 걷어놓고 보면, 최근 개봉한 영화 중에 타란티노 만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민낯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카롭게 해부하는 감독이 또 있을까 싶다.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나고 자란 드니 빌뇌브가 최근 개봉작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를 통해 법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조명하는 극현실주의 스릴러를 만들긴 했지만, 가장 강하고 독한 자가 가장 오래 버틴다는 타란티노 세계관 속 미국은 그의 독특한 영화 스타일만큼 특별하게 다가온다. 1월 7일 CJ CGV 단독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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