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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산책하는 침략자' 사랑의 힘을 강조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기이한 SF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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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라졌던 신지(마츠다 류헤이 분)가 돌아왔다. 그런데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이상하다. 한 때 신지와 헤어질까 생각했었던 아내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 분)는 그런 신지를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살뜰히 챙긴다. 하지만 신지 주변에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당황해하던 나루미는 신지가 외계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올해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첫 공개된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침략하는 산책자>(2017)는 SF영화다. 마에가와 토모히로 작가가 쓴 동명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은 <침략하는 산책자>는 구로사와 감독에 의해 영화 외에도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라는 제목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 실종된 뒤 외계인이 된 남자 주인공이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고 다니며 대혼란을 일으키는 기본적인 스토리는 같다. 그러나 지향하는 장르와 이야기는 다르다. 드라마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외계인의 침략에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남녀주인공의 사랑으로 위기를 이겨내고자 한다. 


<산책하는 침략자> 이전에도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는 늘 ‘사랑’이 빠지지 않았다. 다만, 구로사와 감독 특유의 컬트적 면모가 사랑이라는 색채를 옅게 만들 뿐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 속 사랑은 늘 비극으로 끝났다. 굳이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최근작인 <해안가로의 여행>(2015), <은판 위의 여인>(2016)의 사랑은 처절한 슬픔만 남긴다. 




그런데 <산책하는 침략자>는 좀 많이 특이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영화 아니랄까봐 영화 시작부터 사람이 죽어나가고 끊임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죽거나 정신 이상자가 되는데, 무섭다기보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산책하는 침략자> 자체가 기존 구로사와 작품들과는 달리 대중적인 장르적 쾌감에 초점을 맞춰 제작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구로사와 영화들을 지탱해오고 있던 세계관의 변화가 눈에 띈다. 


앞서 말했지만,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비극의 색채가 강하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반복하다가 내면에 자리한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유독 죽음, 폭력, 유령 등 공포를 자극하는 소재가 떠도는 것도 불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포착하고 싶었던 감독의 욕망이 컸다. <산책하는 침략자>에도 기존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캐릭터와 플롯이 존재한다. 세상에 대한 염세와 냉소로 가득했던 주간지 기자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 분)은 우연히 자신에게 가이드를 부탁하는 외계인(타가스기 마히로 분)을 알게되고, 외계인들의 지구 침략을 도와준다. 지구인인 사쿠라이가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작정한 외계인들을 도와준 이유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미스터리로 남는다. 아마도, 사쿠라이는 그들의 정체를 믿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설령 그들이 외계인이라고 한들 그들을 도와주어서 자신만 살아남으면 되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류가 멸망해도 사쿠라이 본인은 잃을게 없으니 이판사판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도와줬을 것 같다. 




사쿠라이와 외계인, 그리고 여고생의 탈을 쓴 또다른 외계인(츠네마츠 유리 분) 사이에는 애시당초 믿음,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지구침략을 위해 함께 우주를 건너온 외계인들 간에는 끈끈한 동료애가 존재하겠지만, 사쿠라이에게 외계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대상일 뿐이지 서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공존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신지의 몸을 빌린 외계인과 나루미의 관계는 다르다. 원래 부부 였던 신지와 나루미는 신지가 외계인이 된 이후에도 그에 대한 나루미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언어로 점철된 개념을 빼앗으며 그들의 의식에 혼선을 빚게했던 신지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을 수집하는 데는 실패한다. 오히려 사랑 앞에서 굴복 하고야 만다. 


신지에게서 개념을 잃었던 사람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스스로를 옭죄고 있던 압박감에서 한결 자유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가진 것을 쉬이 놓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가 사라질 때 혹은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또한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항상 죽음과 이별, 소멸과 마주하는 인간은 그래서 불안하다. 


그럼에도 신지를 사랑하는 나루미는 그를 믿고, 역으로 위협에 처한 신지를 지키고자 한다. 온갖 위험과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나루미가 신지를 지키려는 이유는 딱 하나. 신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루미는 신지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신지가 그녀의 곁에 있어주면 된다. 그리고 대가나 이해 관계를 따지지 않는 나루미의 헌신과 애정은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낸다. 





염세와 냉소, 비관으로 점철 되었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변했다. 그간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어두운 공포를 사랑했던 오랜 팬들에게는 <산책하는 침략자>가 다소 아쉽게 비추어질 수는 있겠지만, 한결 따뜻해진(?) 기요시도 싫지 만은 않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관을 유지해왔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대중성을 이유로 자신의 고유의 색깔을 잃은게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 기요시의 영화는 여전히 독특하고 기괴하다. 그리고 불완전하고 나약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한다. 최근 <해안가로의 여행>, <은판 위의 여인> 등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최근작들이 아예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거나, 수입이 되었다고 한들, 극장 개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바로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 시장에 풀리는 일이 빈번한데, 부디 <산책하는 침략자>는 스크린을 통해 국내 관객들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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