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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내 딸 서영이. 극단적인 설정 이해시키는 김혜옥의 서늘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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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글쓴이는 <내 딸 서영이>란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다.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이런 류의 일일연속극, 주말연속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극적인 상황을 요구하는 드라마 특성상 등장 인물들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기 위한 설정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드라마의 갈등 전개 부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는 일어날까 말까한 극단적인 설정이 빈번하다. 보통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는 사건을 다루니까, 그래서 '드라마'라고 하나, 개연성은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오직 국면 전환을 위해 뜬금없는 '막장 요소'가 나오면 괜스레 피로도만 쌓인다. 


사실 <내 딸 서영이>는 그 어떤 주말 연속극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작가가 <천년의 유산>, <검사 프린세스>, <49일>으로 필력을 인정받은 소현경 작가다. 뻔한 인물 구도, 갈등이면서도 상식적인 범위에서 만날 반복되는 익숙한 구도로 진행된 드라마의 통념을 기분좋게 깨부시는 소현경 작가의 필력은 콘크리트 시청률을 자랑하는 <내 딸 서영이>에서도 통할 것이라 믿었다. 실제 <내 딸 서영이> 전작이 주말연속극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기에 드디어 만날 거기서 거기 였던 KBS 주말 연속극이 변화를 시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부모님이 이 드라마만큼은 매주 빠짐없이 보시기에 어쩌다 옆에서 몇 번 지켜본 <내 딸 서영이>도 결국은 일일극, 주말극에서 수도없이 반복되는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실 설정만 놓고 보면 <내 딸 서영이>는 기존 막장 연속극과는 확실히 급이 다르다. 분명히 서영(이보영 분)에게는 아버지 삼재(천호진 분)를 피하고픈 충분한 원인이 있었고, 결혼할 우재(이상윤 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것도, 그럴 만한 상황이 있었다. 서영을 둘러싼 비밀을 알게된 우재가 180도 바뀌어 싸늘한 남편이 된 것도 그 상황 자체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 딸 서영이>는 등장인물들간의 갈등을 과도하게 몰아붙인다. 이럴 땐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어느 한쪽이 굽히고 들어가면 오히려 쉽게 해결될 문제임에도 불구,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서영과 우재 부부는 서로의 진심을 왜곡 해석하여 더더욱 갈등 요소를 증폭시킨다. 


가뜩이나 <내 딸 서영이> 메인 커플 서영, 우재가 지지부진, 거기서 거기 냉전으로 피로도만 늘리는 사이, 이제는 뜬금없이 우재 동생 성재(이정신 분)의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툭 튀어 나왔다. 애초 성재는 강기범 회장(최정우 분)과 차지선 여사(김혜옥 분) 집 대문 앞에서 업어온 자식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시청자들은 성재가 평범한 업둥이(?)아닌 강회장과 강회장 비서 윤소미(조은숙 분)이 불륜으로 낳은 자식임을 훤히 알고 있었다. 오직 차여사님만 이 끔찍한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강회장의 아들을 낳자마자 강회장 대문 앞에 아이를 맡긴 윤소미는 그 뒤에도 꾸준히 강회장 비서노릇을 하며 강회장과 차여사, 성재의 주위에 얼씬거린다. 아니 남편의 애를 낳고 그 애를 자기에게 맡긴 것에 모자라, 그 사실을 감쪽같이 속이고 수십년을 남편의 비서랍시고 살아왔으니  이 정도면 남편에게 이혼 요구는 기본, 위자료도 두둑히 받아낼 법도 하다. 


재벌가의 혼외 자식 문제는 더 이상 막장 드라마의 엑기스로만 치부될 수 없을 정도로 실제로도 종종 들려지는 소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 딸 서영이>는 성재의 출생의 비밀을 통해 무늬만 화려한 가족을 빙자한 상류층의 허세를 비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보기에 우리나라의 대부분 드라마들은 재벌가의 출생의 비밀에 많은 공을 들인다. 드라마를 너무 보다보면, 나도 혹시 재벌의 버러진 자식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왜 그리 숨겨진 재벌가 아들, 딸들이 많은거지. 그 중에서 출생의 비밀의 갑을 꼽자면, 단연 <메이퀸>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강탈한 웬수가 알고보니 자신의 진짜 아버지라니...이것보다 더 코미디는 있을 수 없다..(그럼에도 시청률이 꽤 잘나왔다..쩝)





다시 <내 딸 서영이> 삼재와 차여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 딸 서영이>를 즐겨본 시청자분들은 안다. 차여사와 성재가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성재는 그 때까지 차여사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은 입양된 자식이었지만, 차여사는 우재, 미경이보다 성재에게 더 많은 공을 들이고, 더 많은 모성애를 부여한다. 워낙 똑똑하고 잘난 우재, 미경이와 차여사와 놀아줄 시간조차 없긴 하지만 차여사는 성재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성재 또한 공부를 못하고 연예인한다고 강회장 내외 속을 박박 긁어놓은 것빼면 차여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같은 아들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우리 성재가...알고보니 강회장 자식에...그것도 생모는 강회장의 오랜 비서 윤소미란다...이런 꼬리가 아홉달린 여우보다도 더 요망한 년.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하는 차여사는, <내 딸 서영이>에서 길이길이 남을 오열을 터트린다....아마 차여사는 뒤늦게 알은 남편놈의 불륜보다, 사랑하는 아들 성재가 남편의 혼외 자식. 그것도 윤비서 아들이라는 것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강회장 아들이 아니라서 좋았는데...."


<내 딸 서영이>초반만 해도 차지선 여자는 국회의원 3선을 지낸 명망있는 집 딸로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철없는 공주였다. 뭐 하나 부족함없이 자랐으니 당연히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 그녀가 아무런 배경없는 서영을 곱게 며느리로 받아들일리 없다. 게다가 자기완 다르게 우재의 사랑받는 서영에게 배가 아프기 까지 한 차여사. 그래도 명문가 출신인데 대놓고 시집살이를 시킬 수는 없고, 그래서 그녀는 귀족출신답게 우아하게 며느리를 갈군다. 그럼에도 수십년 가량 남편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내야했던 지선의 지독한 외로움과 허전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예순이 다된 나이에도 아이들의 엄청난 등록금과 퇴직 압박에 시달리는 남편 때문에 힘겨운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또래들과 달리, 국회의원 아버지 만나 지금까지도 왕비처럼 곱게 살고 있는 차지선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먹고 사는게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해지고 있는 지금, 상위 1%로서 잘먹고 잘 사는 그녀와 같은 부류에게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줄 알았다. 


어쩌면 먹고 사는데 지치지 않았으니까, 남편의 사랑이 고픈거고, 집안 배경 안좋은것 빼곤 머리 좋아 판사까지 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며느리가 못마땅스러운거겠지.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차지선에게 뒤늦게 날라온 날벼락은 그녀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산산조각 부수어낸다. 


허영심이 상당하긴 하지만, 차지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정'이었다. 결혼 이후 자신을 '평생 연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남편 강회장이 불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가정'을 지켰고 많이 사치스럽고 신경질적인 것을 빼면 아이들 둘다 잘 키우고, 호스트바도 안가고, 재벌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국회의원 자녀 출신 재벌가 아내이기 때문에 분수에 맞는 사치가 현실적으로 보여질 정도다. 


그런데 강회장은 참 보기 좋게 차지선을 물먹인다. 혼외자식은 하룻밤 실수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허나 강회장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꽤 오랜 세월동안 강회장 옆에서 꼬리 숨기면서 비서 노릇을 해왔다는 것은 같은 여자로서도 참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음이다. 이건 불륜으로 깨진 부부간의 신의를 넘어, 차지선 하나를 제대로 '바보'만들어 놓은 것이다. 


수십년 동안 숨겨온 모욕에 '멘붕'이 찾아온 차여사는 이 어처구니 없음에 깊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곧바로 강회장에게 협의이혼 서류를 작성한다. 그리고 차여사는 그토록 자기몸처럼 사랑했던 성재마저 쫓아낸다. 차여사 찾아 달려온 성재에게 건낸 지선의 말을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눈매가 엄마 닮았네...."


이런 식으로 그 가증스러운 윤소미 뱃속에 나온 성재에게 상처주고 자기 곁을 떠나게 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성재를 보내지 못하는 것은 차여사다. 힘겹게 성재를 보내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신이 싫어 더더욱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자학이 거듭된다. 


그러는 와중에 삼재 친모인 윤소미는 이제와서 성재의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지금까지 성재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천하의 윤비서가 이제 성재도 클만큼 컸고, 모든게 다 들통나니 뒤늦게 엄마가 되겠단다. 그래도 성재를 낳은 엄마니까 20년 가량 참아온 모성애가 다시 불붙었다는 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지금 흘려가는 구도로 봤을 땐 참으로 할 말없는 설정이다. 그저 이 황당한 설정을 참고 견뎌내야하는 차지선과 강성재가 안타까울 뿐이다. 단순 회장가의 혼외자식을 낳은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찾는 뻔한 과정을 넘어, 수십년동안 강회장 곁을 지켜온 비서가 알고보니 회장 부인이 애지중지 기른 입양아의 친모라니....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을 찾고 침착할 수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일 정도다. 





회장의 혼외자식까지 낳은 여자가 수십년동안 모두의 눈과 귀를 속이고 비서로 오랫동안 회장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것조차 현실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긴 하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니까 가능한 것이지. 하지만 이 억지스러운 대목도 남편의 뒤늦은 외도와 혼외자식 정체에 배신감을 느끼고 이성을 잃은 여자를 실감나게 연기한 김혜옥의 연기에 안타까운 눈물만 앞선다. 그동안 손바닥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공주처럼 살아온 죄 치곤...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건 단순히 남편이 부인 몰래 바람핀 정도를 넘어선 '농락'아닌가. 





특히나 애써 자기 품에서 애지중지 키워놓은 윤소미 핏줄 성재를 떨어트릴 때 김혜옥이 지었던 서늘미소는 단순 소름을 넘어, 성재를 떼어내기 위해 가슴 속으로 수도 없이 울었을 차지선의 복잡다난한 심경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김혜옥이 왜 요근래 수많은 드라마에서 각광받는 배우인지를 입증시킨 명장면. 이게 바로 진정한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몰입도의 끝판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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