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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용서,격려가 아니라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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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의 주인공 오수(조인성 분)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조무철(김태우 분)에게 "구더기가 들끓는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10년 전 오수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에도, 끝내 오수에게 버림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사로 즉사한 희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수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이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요즘같이 친자 유전자 감식 확인이 고도로 발달되어있는 시점, 그럼에도 오수가 곧 들통날 위기에도 가짜 오영(송혜교 분) 오빠 노릇을 하게된 배경에는 조무철에게 줘야할 78억원이 있었다. 오수가 일년 전 감옥에 가기 전, 김사장의 스폰을 받고 있는 여배우 진소라(서효림 분)는 김사장의 재산 상당수를 오수에게 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 따위 믿지 않는 오수는 끝내 소라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결국 오수는 그 뒤로 감옥 살이를 해야했으며, 출옥한 이후에도 78억원을 미끼로 조무철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조무철이 약속한 100일 안에 78억원을 갚지 못하면, 오수는 조무철 손에 죽는다. 이리 죽으라 저리 죽으라, 하지만 어찌 모르는 일인지 살고 싶었던 오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가짜 오영 오빠 노릇을 택한다. 


돈 때문에 오영에게 접근했고, 처음에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에 차가움으로 일관하는 오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당시만해도 어서 빨리 78억원을 챙겨, 냉기가 흐르는 저택에서 나오고 싶었으라. 하지만 오영을 차츰 알아가면서, '사랑' 따위 믿지 않았던 냉정한 오수도 서서히 변해간다. 오영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주위의 기류를 확인한 오수는 진짜 그가 오영의 오빠인양, 오영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오영을 지켜주고 싶었다. 오영 이전 유일하게 사랑하던 희주를 잃는 순간에도 언제나 자신의 안위가 먼저였던 오수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가짜 오빠 오수를 만나기 전부터, 오영의 머릿 속에는 온통 '죽음'뿐이었다. 하늘은 오영에게 굴지의 대기업 PL그룹 유일한 후계자에, 절세 미모에 총명만 두뇌를 안겨주었지만, 사물의 형체를 볼 수 있는 '눈'만큼은 주지 않으셨다.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대신 오영은 귀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했다. 눈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오영은 눈만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보다, 사람과 세상을 잘 보는 또 다른 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오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악용' 하여 그녀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실질적으로 오영의 새 엄마인 왕비서(배종옥 분)은 물론, 오영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미라(임세미 분)조차 믿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정혼녀가 있음에도 PL그룹 회장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오영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으로 일관하는 이명호 본부장(김영훈 분)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겠지만 그의 행위만 놓고 본다면 엄연히 오수보다 더 한 악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두다 앞에서는 오영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지만, 정작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현실에서 오영이 더 이상 힘겹게 삶을지탱해야할 이유는 없어 보일 정도다. 심지어 충분히 수술로 눈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 오영을 그대로 방치해놓은 왕비서의 행위는 아무리 오영을 사랑해서 그랬노라 하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악행이다(물론 우리 노희경 작가는 왕비서도 조무철처럼 그럴 수 밖에 없었노라하는 설득력을 부여하겠지만)


그런데 오수가 오영 곁을 찾아온 이후, 이제 오영에게는 어린 시절 엄마 외에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오수 또한 진짜 오빠도 아니고, 돈 때문에 오영을 찾아온 것이지만, 점점 오수를 믿고 차가운 허울을 벗고 본래의 순수하고 착한 성품으로 돌아온 오영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따위 믿지 않았고, 자기에게는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희주만 있다고 여겼던 오수는 어느순간 자신의 몸뚱아리보다 먼저가 된 오영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난날 오수는 스스로 생각해도, 조무철 말처럼 '구더기가 들끓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희주가 자신을 뒤따라오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 무철과 희주 동생 희선(정은지 분)은 희주를 배신한 오수를 질책하였다. 난 그 때 그 상황을 감당하기엔 어렸다는 오수의 말에, 무철은 넌 이미 충분히 책임질 수 있었다면서 오수를 힐난한다. 아마 무철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등진 순수한 여자에게 가차없이 등을 돌린 오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열아홉 나이에 사랑하는 여자를 완전히 잃어버린 오수의 아픔은 꿈에도 모르는 채 말이다. 


희주가 떠난 이래 오수도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잘 먹고 잘 살아왔지만, 그 또한 한 시도 자신 때문에 죽은 희주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오수는 남의 이야기인마냥, 오영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다. 어릴 적 나무 밑에 버러져, 이름도 나무 수인 오수는 행여나 자신과 닮은 아이가 태어날까봐 겁나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뒤도 안 돌아보고 버렸고 어쨌든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책임지지 못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스스로에게 모진 화를 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영은 차분히 대답한다. 


"네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다들 오수가 쓰레기 같다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가 쓰레기처럼 살게된 배경을 알려고도, 그래서 그를 있는 그대로 봐주려고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수 말처럼 너는 원래 태생부터 쓰레기니까 쓰레기처럼 사는구나로 대수롭지 않게 분노만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오수가 태어날 때부터 상처받은 영혼임을 직감한 오영은, 오수의 아픈 부위를 짚고 적잖은 위로를 보낸다.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도 해도 돼. 울어도 돼. 하루이틀 울다가 괜찮았을거야."


여섯 살. 사랑하는 엄마, 오빠와 헤어진 이후, 눈까지 멀게된 오영을 따스하게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 이제 겨우 여섯살인 오영에게 '용기'를 강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오영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였다. 설령 빈말이라고 해도 좋다. 돈 때문에 접근한 것이라도 좋다. 


그저 오영은 자신이 믿을 수 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순간만이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자신의 응어리를 보챌 수 있는 존재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존재를 만나는 순간, 그 누구보다 강하고 차가울 줄 알았던 오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서서히 오수와 공유하는 순간, 정확히 엄마, 오빠가 그리워 밤낮으로 울었던 6살 그 시간에 멈춰있다. 아니 오영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 자신이 진짜 믿을 수 있고  품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상대에겐 어린아이처럼 보채고 싶어진다. 그건 오영을 만난 오수도 매한가지다. 세상 그 어떤 누구가 오영만큼 오수를 위로했던 존재가 있었을까. 




난생처음 듣는 따스한 위로에 오수는 오영 모르게 숨죽여 운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서 위로받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우는 오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영 말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용서, 격려, 질책이 아니라 위로다. 


위로가 필요한 것은 오수, 오영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날이 갈 수록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점점 희망이 사라지고 지쳐가기에 그 어느 빼보다 절실히 위로가 필요한 시대. 조인성과 송혜교를 빌려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희경 작가의 따스한 대사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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