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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퓨어. 위선과 가식을 향한 우울하고도 담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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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에 흘려 나오는 노래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카타리나(알리시아 비칸데르 분)에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동안 그녀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하는 특별한 매개체였다. 레퀴엠을 접한 이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지적 욕구와 달리 카타리나의 현실은 여전히 남루하다. 







우연히 예테보리의 콘서트홀을 들렸다가 콘서트홀 수습사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카타리나. 하지만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세계라 믿었던 그 곳은 되레 카타리나를 더욱 괴롭힐 뿐이다. 


영화 <퓨어>는 문화적 취향마저 신분과 계층으로 구분되어진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사상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유튜브를 통해 클래식을 처음 접한 이후 모차르트만 듣는 카타리나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은 조롱과 냉담뿐이다. 돈이 부족하여 장보기도 여의치 않고, 과거 스캔들 때문에 다니던 식당 직원 일마저 그만두어야했던 카타리나가 적지 않은 관람료를 내야하는 콘서트홀을 찾는 것은 크나큰 사치였다. 


그럼에도 클래식이 좋았던 카타리나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콘서트홀 수습사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곳에서 카타리나에게 잠재되어있던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워준 지독한 완벽주의자 마에스트로 아담(사뮤엘 프륄러 분)과 위험한 사랑에 빠진 카타리나는 클래식과 에켈뢰프의 시와 키에르케고르를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콘서트홀이 좋았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어머니가 아닌, 알코올중독자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카타리나에겐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일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퓨어>에서 두드러진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예상을 뒤엎는 전개와 문화마저 계층으로 구분 짓는 세상에 대한 통렬한 시선이다. 


유부남인 아담과 잠시 불륜관계에 놓인 카타리나를 몰락시킨 이는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아닌,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아담이다. 젊고 아름다운 카타리나의 육체를 탐하면서도 상류층으로서의 부와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은 아담은 그가 카타리나에게 가르쳐준 에켈뢰프의 명언 “용기만이 살길이다.”와 맞물려 가식적이고도 속물적인 부르주아의 위선을 명확히 드러낸다. 


카타리나에게 에켈뢰프의 명언을 일깨워준 이는 아담이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실천한 이는 카타리나였다. 그렇게 <퓨어>는 기득권 유지하기 급급한 위선적인 어른들을 향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희망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현실을 딛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굳은 결심과 용기가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넌지시 일깨워주는 영화 <퓨어>. 




어쭙잖은 신데렐라 스토리로 어설픈 위로를 안겨주는 대신, 클래식을 즐겨듣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하층 계급의 우울하고도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스토리텔링도 일품이다. 


첫 장편영화 데뷔작임에도 불구, 카타리나의 시선을 빌려 위선적인 사회를 향해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는 리자 랑세트 감독. <로얄 어페어>,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연기파 배우로 입지를 굳힌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미래가 사뭇 궁금해지게 하는 영화다. 6월 20일 개봉.


한 줄 평: 위선과 가식을 향한 우울하고도 담대한 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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