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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나의 독재자. 설경구와 박해일의 명연기가 살린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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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한반도에 최초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어느 날, 한 극단의 무명 배우였던 성근(설경구 분)은 우연찮게 연극 <리어왕>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아, 그토록 꿈꾸던 대로 아들 태식 앞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 제대로 얼어버린 성근은 태식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하게된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주눅든 아들을 위해서 다시 무대에 서고자 안간힘을 쓰던 성근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배역을 맡게된다. 하지만 그 배역 때문에 성근과 태식의 사이는 회복 불능의 단계로 접어든다. 





영화 <나의 독재자>는 가장 큰 틀에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 성근과 아들 태식(박해일 분)은 첨예한 갈등 상태다. 아들 태식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는 아버지 성근을 증오하고 미워한다. 반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김일성이라는 배역에 극강으로 몰입되어버린지라 본인을 김일성이라고 믿는 아버지 성근은 자신의 혁명 임무 완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매몰되어버린 아들 태식이 못마땅스럽다. 


그런데 <나의 독재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은 단순히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설정된 극 중, 1974년 당시 국가 정보 기관의 필요에 의해 철저히 김일성으로 만들어진 성근은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온갖 억압을 달게 받아야했던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근에게 김일성이 되길 강요하는 오계장(윤제문 분)의 극악무도한 간계와 더불어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겠다는 성근의 욕망이 합쳐져 김일성보다 더 김일성 같은 희대의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 성근이 김일성보다 더 김일성같은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에 대해서 알 지도, 그렇다고 알려고도 하지도 않는 태식은 허구헌 날 ‘인민’과 ‘혁명’만을 찾는 성근이 야속할 뿐이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은 돈을 향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보란듯이 화려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싶지만, 돌아오는 것은 엄청난 빚더미뿐이다. 


결국 빚을 갚기 위해 성근의 도움이 절실했던 태식은 다시 아버지를 과거 함께 살던 옛 집으로 돌아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분당 신도시 개발로 성근의 집을 제외하곤 모두 다 헐리고 공사 중인 허허벌판에서 성근은 외롭게 자신만의 혁명 임무 완수를 꿈꾸고 있었다. 





순박하고 언제나 ‘을’의 입장에만 있었던 성근이 갑자기 아들마저 진절머리를 흔들게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성근은 항상 무대를 꿈꾸었고, 아들 태식을 포함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깊은 연기를 선사하며, 그들에게서 환호와 갈채를 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성근은 그러지 못했고, 어렵게 찾아온 역할조차 무대공포증으로 허무하게 날려보낸다. 그래서 성근은 배우로서 자신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김일성’ 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까지 버리고 김일성 그 자체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성근은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성근이 20년 이상 김일성이라는 가면을 벗지 못한 데에는 진심으로 원하고 소망했지만 누군가의 억압에 의해 무너져버린 자신의 꿈에 대한 미련과 울분이다. 성근이 김일성이 되기까지 국가에게서 받은 폭력과 상처는 단순히 물질적 보상으로 치유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인해 망가진 인물의 쓸쓸한 군상보다도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화해를 더 원한듯한 <나의 독재자>는 성근이 태식 앞에서 20년 전 미처 보여주지 못한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것으로 20년 동안 쌓인 묵은 앙금을 훌훌 털어내고자 한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남몰래 혼자 끙끙 방치하여 곯아버린 종양을 발견한 아들은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배우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굴곡진 한이 아들에게 잠시나마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사무친 원한과 아쉬움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극 중 김일성 역할에 제대로 몰입되어가는 성근을 통해 진정한 메소드 연기를 선사하는 설경구와 박해일의 눈물 연기는 감동적이지만, <나의 독재자>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여전히 진한 의문이 남는다. 10월 3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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