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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응답하라 1988 7회. 신해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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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길이 남을 사건도 있지만,  1988년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해철이었다. 당시 TV 생중계로 MBC <대학가요제>를 지켜보던 시청자 대부분이 마지막 16번째팀으로 등장한 신해철의 ‘무한궤도’를 대상으로 찍었고, 심사를 맡고 있던 조용필은 ‘그대에게’ 전주만 듣고 바로 대상으로 낙점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기 전, 당시 “멤버들 다들 여자친구 있나?”는 김은주 아나운서의 질문에 스무살 신해철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절대 그럴 일이 없죠.”라고 답한다. 아직 노래를 부르기 전 이었지만, 그 때 이미 ‘무한궤도’로 판세가 기울 었을 지도 모른다. 명문대에 다니는 잘생긴 오빠들이 여자친구도 없다(?)니. 게다가 그공부 잘하고 잘생긴 오빠들이 들고나온 노래는 전주 만으로도 앞에 나왔던 음악들을 까마득하게 잊게 할 정도로 끝내주게 좋았으니, 바야흐로 신해철 시대의 서막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대학 축제 응원가로 자동 반사되는 밝고, 명량한 노래였다. 가사는 영락없이 이제 막 사랑에 눈 뜨기 시작한 풋풋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대학가요제 이후 수많은 대학에서 어여쁜 치어리더들의 율동과 맞춰 목청 터져라 청춘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찬미 했던 이 노래. 하지만 2014년 10월 27일 고 신해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그대에게’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예전만큼 티없이 해맑은 소년의 웃음처럼 싱그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난 27일 tvN <응답하라 1988> 7회의 부제는 ‘그대에게’다. ‘그대에게’는 <응답하라 1988> 시작과 함께 울러퍼지는 공식 오프닝곡이기도 하다. 1988년에는 당시 <대학가요제>에서 쌍벽을 이뤘던 <강변가요제>의 대상곡 이상은의 ‘담다디’도 있었고,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던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등 많은 히트곡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신해철의 ‘무한궤도’를 선택한 것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고 신해철을 향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은주 아나운서와 인터뷰에서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했지만,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이 그간 사랑했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목청 터져라 외치는 신해철의 세레나데는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기 충분했다. 가사만 놓고 보면, 그 전 해 1집 앨범만 달랑 남겨 놓고 떠난 고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에 버금가는 가슴 절절한 사랑 노래인데, 이상하게도 ‘그대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응원가로 불러지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같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대에게’의 그대가 과연 사랑하는 연인만을 대상하는 지칭일까 궁금해졌다. 분명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 나누고 싶다는 ‘그대에게’는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간절히 묻어나는 노래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포기하지 않는다.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그대 곁에 있겠다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분명 좋아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노래이지만,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노래로 다가오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고백송은, 매일 시내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청춘들이 목숨걸고 싸우고 있는 이 비상시국에,  허구헌 날 사랑타령만 한다는 당시 가요들을 탐탐지 않게 생각했을 법한 대학생들에게도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오는 노래였다. 


물론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신해철 또래 대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관심 보다도 음악에만 탐닉하는 미소년 신해철은 그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던, 엄밀히 말하면 온실 속 화초에서 곱게 자라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조현문처럼 재벌가 자식도 아니었고,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하였지만, 고교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스무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부모님께 효도할게요”라는 멘트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1974년 봄에 이별한 병아리의 죽음을 어른이 된 이후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일찌감치 삶과 죽음에 눈 뜬 신해철은 자신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치열한 고민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해법을 찾은 듯한 신해철은 음악 속에 파묻혀 살던 유약한 미소년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겁없이 쓴소리를 날리는 독설가가 되어있었다. 





한 때 민주주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1980년대 또래 청춘들이 이제 현실이란 무게에 짓눌러,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고 있을 때, 스무살 어린 나이에 주류문화의 스타로 떠올랐던 신해철은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과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음악, 정치, 사회, 문화 등 신해철은 자신이 진짜 목숨걸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타협이 없었다. 신해철이 살아왔던 지난 46년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걸고 싸우는 투사였다. 비록 중간중간 신해철이라는 사람에게 실망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신해철처럼 자신이 남긴 음악, 메시지, 철학과 비교적 일치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드물다. 


그런 신해철도 사랑하는 여인(윤원희)을 만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일침도 서슴지 않게 날리던 시대의 논객은 부인과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 하여 낯부끄러운 닭살 금슬을 과시하고, 자상한 아빠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예전과 비해 많이 달라진 그였지만, 신해철이 가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대(가족)을 위해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그대를 지키기 위한 신해철만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그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귀담아 듣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싸워온 신해철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그대 사랑해…” 


<응답하라 1988> 7회에서 오손도손 모여앉아 <대학가요제>를 시청하던 쌍문동 아이들은 어느순간 약속이라도 했듯이,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쌍문동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어느덧 ‘그대에게’의 마지막에 접어든다. 그러고보니 ‘그대에게’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었다고 한들, 이 노래의 끝까지 귀 기울어서 들은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의도적으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자신의 마지막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스무살의 신해철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그대를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수줍은 고백을 마무리 짓는다. <응답하라 1988>에서 아들 최택(박보검 분)을 위해 갖은 정성을 기울 이지만, 특유의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한번도 아들에게 사랑하지 못했던 아버지 최무성의 애틋한 마음처럼, 신해철의 ‘그대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신해철의 부재와 더불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점점 무너지고 있는 시대. 매회마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쌍문동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라야한다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대에게’만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노래가 또 있을까. 이제는 대학 응원가보다 <응답하라 1988>의 시그니처 송으로 기억될 ‘그대에게’가 오늘따라 더욱 먹먹 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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