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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응답하라 1988 8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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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응답하라 1988>에서 생각지도 못한 복권당첨으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김성균, 라미란 부부의 유일한 근심거리는 큰 아들 정봉(안재홍 분)이다. 





대학 입시에 연이어 실패해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취미 생활에만 열중하는 정봉이만 보면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성균과 미란은 정봉이를 다그치거나, 혼줄을 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모든 것을 달관한 것 같은 라미란의 쿨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수제비로 간신히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이 정봉이가 산 복권으로 부자가 되었으니, 이 들 가족에게 정봉이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구세주요, 은인같은 존재다. 그래서 정봉이 공부를 안하고 취미 생활에만 몰두해도 그럴러리 넘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 가족에는 정봉의 6수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연이은 대입실패도 그간 정봉이 겪었던 일에 비하면 한낱 지나가는 바람 뿐이다. 그렇다. 정봉이는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아왔고, 그 이후도 계속 크고 작은 수술을 몇 번 받아왔다. 1987년에 판막을 교체하는 대수술을 받은 정봉이는 지난 28일 방영한 <응답하라 1988> 8회에서는 인공심박동 교체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연이은 대입 실패에도 불구, 왜 그렇게도 김성균, 라미란 부부가 계속 시험을 보게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도 들어가고 대우받고 살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존재하는 시절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수도 아니고, 6번의 실패에도, 그것도 공부할 마음이 별로 없는 정봉이에게 계속 학력 고사 준비에만 매달리게 하는 것은 부모나 정봉이나 모두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몇 년 전과 달리, 집도 잘 살고, 김성균이 운영하는 가전제품 대리점도 잘 되고 있는만큼, 차라리 그 쪽으로 정봉이의 진로를 바뀌어보게 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 8회를 보고, 왜 그리 성균과 미란이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정봉의 대학 합격에 왜 그리 목을 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들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니까, 대학에 들어가서 그래도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 그래서 성균과 미란은 매년 이어지는 정봉의 불합격 소식에도 불구, 언젠가는 그들의 귓가에 들릴 지도 모르는 큰 아들의 대학 합격 소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이 누구나 붙잡아도, 사연없는 사람은 없듯이,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속 사정이 있다. 김성균, 라미란 네 처럼, 가난도 벅찬데, 아들의 병마와 힘겹게 싸웠던 사람들도 있었고, 은행원이라는 제법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빚보증을 잘못 서서, 몇 십 년 째, 반지하방 생활을 면치 못하는 성동일, 이일화 가족도 있다. 선우,진주 엄마 김선영과 택이 아빠 최무성은 각각 남편과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매 회 볼 때마다 <응답하라 1988>이 감탄스러운 순간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소외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쌍문동 골목 아이들 중에서 동룡(이동휘 분)이 등장하는 분량이 현저히 낮다는 아쉬움이 제기 되지만, 지금은 덕선(혜리 분)의 유력한 남편 후보로 급부상한 최택(박보검) 또한 드라마 초기만 해도 출연 분량이 적었으니, 회가 갈 수록 동룡이의 비중 또한 점점 커지지 않을까. 


한편, 성덕선-김정환(류준열 분)-최택 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 이외에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선우(고경표 분)와 성보라(류혜영 분)의 관계도 조금씩 진전되고 있다. 반듯한 모범생 선우가 쌍문동 최고의 폭군(?) 보라를 남몰래 연모하는 이유가 그와는 정반대인 거친 매력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들었다. 하지만 선우가 보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의 차가움 속에 숨겨진 따뜻한 면모 때문이라고 한다. 





사연인 즉슨, 이렇다. 시간을 거슬러 2년 전으로 올라가, 선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선우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의 나이 고작 16세. 장례식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찍 아버지를 여읜 선우를 위로하고 격려 했지만,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선우의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위로는 보라가 전한 따뜻한 말 한 마디였다. 


그 때 선우가 기억한 보라는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소녀였다. 하지만 2년 뒤 성보라는 많이 변해있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서울대를 갔다는 집안의 자부심,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이 마음에 걸리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시대의 소명, 그 와중에도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도록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타야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아직 스물한살에 불과한 가녀린 소녀가 짊어져야 할 짐은 의외로 무거웠고, 그 때문에 성보라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오는 강철 여인이 되어야했다. 





성보라의 전 남자친구(박정민 분)는 이별을 통보하는 성보라에게 "여자로서 최악이라는." 막말을 퍼붓는다. 보라 친구와 바람을 핀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 그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자신이 이렇게 애걸복걸 하면서 사과를 하는데 왜 받아주지 않느냐는 식이다. 사과는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피해자가 그 진심을 받아들어야 진정한 사과가 이뤄지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나 사과했다. 그러니 잊어라 이런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린다. 아니, 요즘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되레 역성을 드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무튼, 보라의 전 남자친구는 분명, 사과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 좋아하던 남자친구,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낀 보라의 쓰라린 좌절까지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 비가 쏟아지는 12월의 어느 날, 우두커니 앉아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보라를 위로한 건,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다. 


유독 <응답하라 1988>에는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 그리고 그 곡을 리메이크한 이적의 노래가 많이 들린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와는 다르게,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 대신, 가족의 이야기를 최대한 담아내고자 한다. 





여전히, <응답하라 1988>에서 가장 주목받는 메인 이벤트는 덕선의 남편 찾기와, 한술 더떠 이제는 보라의 남편이 누군지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은 젊은 여주인공들의 남편이 누구인지보다, 1988년 쌍문동 골목길을 살았던 가족들의 일상을 통해, 2015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돋보이는 드라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 특유의 남편 찾기도, <응답하라 1988>에서는 드라마의 흥미를 돋우는 하나의 재미요소일 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 수록 <응답하라 1988>이 성덕선, 그리고 성보라의 남편 찾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진행만 놓고 비추어 봐도, <응답하라 1988>는 지난 시리즈에 비해서 사람들간의 관계를 풀어내는 솜씨가 한층 더 깊어졌고, 더 나아가 청춘남녀에게 국한 되었던 세계관을 가족, 사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5년으로 확장 시키고자 한다.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가 방영 했을 당시에도, 살기 힘들었고, 그래서 대중들의 팍팍해진 정서를 과거 이야기로 위로받고자 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하지만 지금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전 시리즈가 방영 했을 때보다, 더 힘들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시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대중들은 섣부른 희망을 제기하는 드라마와 영화 대신, 요즘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작품들을 찾는다. 그에 반면, <응답하라 1988>은 1988년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지금 이 시국을 어떻게 견뎌내야하는지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괜찮아, 잘 되거야." 식의 지나친 낙관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걱정만 한다고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걱정말아요 그대'의 가사처럼 걱정만 하기보다, 우리 다함께 힘을 합쳐 노래하는 것. 그리고 <응답하라 1988>은 그 첫 시작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제시한다. "괜찮아, 잘 될거야. 그러니 잊어라."가 아니라, 차갑고 냉정할 줄 알았던 의사(김태훈 분)의 진심이 담긴, 따뜻한 위로가 안겨준 잔잔한 감동처럼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는 통에 각자도생을 꾀할 수밖에 없는 삭막한 세상. 그래도 그 유일한 해결책은 역시 "같이 살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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