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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벨파스트' 9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1969년 벨파스트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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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팬에게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테넷> 배우로 친숙한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신작이자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작 <벨파스트>(2021)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인 감독의 어린 시절 경험과 추억을 다룬 반자전적 영화다.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그간 영국 영화, 연극계에서의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일명 성공한 영국인, 브래너 감독에게 그의 출신지이자 유년시절을 보냈던 벨파스트는 마냥 정겹고 평화로운 고향이 아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종교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과 개신교(성공회)-친영국 진영의 극심한 갈등과 분쟁이 지속될 정도로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는 벨파스트는 브래너 감독의 가족이 고향을 등지고 타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였다. 

 

하지만 브래너 감독은 사연 많은 벨파스트의 상처를 예리하게 들추어내기보다 그의 어린시절의 모습을 보는 듯한 9살 소년 '버디(주드 힐 분)'의 시선에서 그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인 가족과 집 근처 골목에 집중하는 영화적 전략을 택한다. '정치적'으로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 논란의 여지를 피하고자 어린 아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여지가 들기도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가톨릭-개신교 주민들간의 분쟁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톨릭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약탈하는 등 영화에서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를 파괴하는 이들은 버디 아버지(제이미 도넌 분)의 어릴 적 친구를 위시한 극우 개신교도들이다. 반면 개신교를 믿지만 일부 신도들의 가톨릭 신도들을 향한 차별과 폭행에 동조할 수 없었던 버디 아버지는 종교-이념을 떠나 가족,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허나 옛 친구의 끈질긴 압박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벨파스트의 상황을 직감한 버디 아버지는 결국 이민을 결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벨파스트를 떠나기 싫어하는 아내(카트리나 밸프 분)와 아이들과 잠시나마 갈등을 겪게 된다. 

 

"아일랜드인들은 떠나기 위해 태어나."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땅을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야했던 사람이 좋은 기억과 좋지 않았던 기억까지 모두 아우르기란 어렵다. 하지만 브래너 감독은 하루가 멀다하고 분쟁이 일어났던 1969년의 벨파스트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가족-친구-연인-이웃 간의 사랑이 꽃을 피웠던 정겨운 고향으로 회상하고자 한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나는 가족의 사랑 못지 않게 버디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음악, 영화의 비중이 심상치 않은데, 흑백으로 찍은 <벨파스트>와 대조되는 영화 속 영화, 연극의 컬러풀함이 인상적이다.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들이 원하지 않은 잦은 분쟁과 갈등에 지쳐가던 버디의 가족들에게 노래와 영화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하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영국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폐암에 걸린 할아버지(시아란 힌즈 분)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버디의 가족들은 할머니(주디 덴치 분)과 함께 가족 영화의 고전 <치티 치티 뱅 뱅>을 보면서 환호를 질렀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벨파스트를 떠나기로 결심한 버디의 아버지는 그가 사랑했던 가족과 이웃 친지들 앞에서 6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 Love Affair의 'Everlasing Love(영원한 사랑)'를 열창한다. 

 

철저히 9살 소년의 시점에서 1969년 벨파스트의 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재구성하는 <벨파스트>는 자연스레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고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족-이념 등 다양한 이슈가 내포된 북아일랜드 분쟁의 본질을 납작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게 한다.

 

 

그러나 <벨파스트>가 50년 전 도시 곳곳에서 벌어진 폭력과 억압으로 자신의 전부였던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옛 고향을 잊고 살아야했던 감독이 해당 영화 제작을 계기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총,칼 대신 음악과 춤, 가족의 사랑으로 무채색의 벨파스트를 좀 더 따뜻하게 추억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영화적 의도와 성취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극중 주인공 버디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 잊고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보편적'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절망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찾아가고자 하는 각본과 연출. 그리고 대부분 북아일랜드 출신들로 구성된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적인 극장 필감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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