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남자>에서 엄태웅이 보여준 동공 연기가 날로 화제가 되고 있군요. 극 중 시각 장애인으로 출연하는 엄태웅의 실감나는 실명 연기와 극한의 감정 표현에 <적도의 남자> 시청률도 껑충 뛰어 올랐구요. <적도의 남자> 촬영 전에 시각장애인들이 머무는 복지관에 찾아가 그분들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하고, 눈이 굉장히 아파옴에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눈을 사시로 만들고 연신 눈동자를 굴리는 엄태웅의 열연에 한시도 보는 이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더군요.
주인공 엄태웅의 연기는 물론, 모든 배우들의 연기 스토리, 연출, OST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간만에 볼만한 웰메이드 드라마로 꼽고 싶을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적도의 남자>입니다. 물론 굳이 옥의 티를 꼽자면 분명 시대 배경은 90년대 초인데 2012년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스타일을 자랑하는 몇몇 세심한 부분이 아쉽긴 하지만 극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의 심각한 옥의 티는 아니니까요.
엄태웅이 소름끼치는 동공 연기에 숨겨진 친구 장일에 대한 복수심을 애써 숨기는 외유내강형 캐릭터를 맡았다면, 이준혁은 태연한 척 하지만 연일 기억을 찾는 선우 때문에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중요한 건 이 둘 모두 서로 앞에서는 자신의 본색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죠. 자신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고 지켜준 친구를 배신한 장일과 그 친구의 배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선우의 대립. 물론 아직까지는 선우가 약자이기 때문에 무작정 장일에게 두드려 맞은 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이 옛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아요.
가뜩이나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도 꺼림칙한데, 거기에다가 나날이 기억이 되돌아와 자신을 긴장시키는 선우가 참으로 못마땅했던 장일. 하지만 가뜩이나 활화산 상태의 장일을 폭발시킨건, 역시나 자신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장본인 아버지 용배(이원종 분)입니다.
이번 6회 대사에서도 잠깐 언급되긴 했지만, 용배는 선우의 친부일지도 모르는 진노식 회장(김영철 분)의 부산 별장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거기에다가 장일 엄마는 도망가고, 그 괴로움에 이기지 못하고 사채까지 손을 데 심지어 조직폭력배들이 학교에 있는 장일에게 찾아와 괴롭히기까지 했군요. 하지만 장일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때문에 장일의 성공에 대한 용배의 집착은 더더욱 심각해져갑니다.
친구를 가려 만나라는 등, 넌 걍 공부만 열심히하면 돼 하면서 장일에 대한 지극적인 헌신이 돋보이긴 했지만, 비교적 악의없어보이던 장일 아버지가 변한 것은, 짖궃게도 우연히 진노식 회장의 선우 양부 살인미수 사건을 목격한 이후부터입니다. 물론 그 때까지만해도 옳고 그름을 알았던 용배는 재빨리 신고를 하여 선우 양부를 구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말린 것은 진노식 회장입니다. 그리고 대신 선우 양부의 시체를 처리해주는 조건으로 장일에게 어마어마한 지원을 약속합니다. 그간 장일 부자를 힘들게했던 사채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도 말이죠.
차마 아들 생각에 해서는 안될 일을 덥석 물어버린 용배. 결국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가장 절친한 선우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말았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장일은 끝내 선우를 배신하고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하고도 잔인한 악마로 변하게 됩니다.
선우를 죽이려고 했다는 죄책감과 혹시나 자신이 죄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장일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고등학교 시절 첫눈에 반했던 지원(이보영 분)이지요. 이미 지원의 마음 속에는 선우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잘만 하면 지원과 장일은 좋은 연인이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저 장일이 일방적으로 지원에게 호감을 표기하고 있는 상태일 뿐인데, 둘이 심각한 관계라고 오인한 용배 때문에 장일에게 정내미가 완전히 뚝뚝 떨어진 지원은 장일을 기피하고, 지원이 자신이 사준 기타를 선우에게 들려주는 모습을 목격한 장일은 또다시 절망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선우를 죽이려고 한 원죄에,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유일한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지원이 선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하게된 장일. 아직까지 아버지 때문에 지원이 자신을 아예 멀리한 것을 모르는 장일은 오로지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선우를 원망하면서 어떤 해코지를 가할지 사뭇 선우의 안위가 걱정되기까지 하네요. 아직까진 눈이 안보이는 선우에게 "넌 거짓으로 안보이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면서 잔혹하게 선우를 구타하는 장일이인터라 혹시나 다음주 장일이 때문에 선우가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 합니다.
아마 장일은 선우가 참으로 원망스러울거에요. 선우가 자신의 뜻대로 아버지 살해 용의자를 찾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면, 자신과 선우는 지금까지도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됬을테니까요. 하지만 애초부터 선우와 장일은 수미 아버지 광춘(이재용 분) 예언대로 친구가 될 수 없고, 아예 만나서는 안될 사이였어요. 두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만, 진노식 회장의 질투심과, 그리고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 해서는 안될 피묻은 거래를 덥석 받아들인 장일 아버지 때문에 비롯된 사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장일 또한 아버지와 함께 악행에 동참하게 된 꼴이니까요.
하지만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 지옥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는 아버지는 결국 아들이 짝사랑하는 연인에게 찾아가 이별을 종용했고, 끝내 아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대못을 박고야 말았어요. 오로지 아들이 검사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간 죄는 모두 자기가 다 받겠다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의 범죄행각을 감추기 위해 아들이 선우에게 저지른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엄청난 벌을 받아야함은 물론, 기어코 아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희망으로 작용했던 사랑마저 송두리째 망쳐놓았군요.
다 아들을 위해서라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들을 파멸로 몰고간 끔찍한 아버지의 사랑. 오직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 주위 사람들 가슴에 피멍을 들게하면서도 내 아들만 잘되면 다 괜찮아하는 용배의 섬뜩한 표정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삐뚤어진 부성애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좀 심하게 과장된 이야기에 소수에 불과할 뿐이지만, 개인과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할 수 있다는 속칭 '꼰대'들의 전형적인 얼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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