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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비주얼보다 돋보이는 노희경의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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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인 일본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이 그랬듯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 오영(송혜교 분)의 주위는 온통 그녀가 가질 '돈'과 관련있다. 오영의 사실상 새어머니이자 그녀의 법정대리인인 왕비서(배종옥 분)은 현재로서는 그나마 오영이 믿을만한 장변호사(김규철 분)에게 오영의 돈이 아닌, 오영 자체를 사랑한다는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지만, 오영은 왕비서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아니, 누군가가 선의로 베푼 도움도 단칼에 거절할만큼 제대로 뒤틀어버린게 오영이다. 


고작 여섯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오빠와 생이별을 해야했던 오영은 그 뒤로 뇌종양으로 시력을 잃고 평생을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했다. 꼭 자신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한 엄마는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고, 하나뿐인 오빠는 왕비서에 의해 오랫동안 연락두절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직접 오빠 오수(정경호 분)가 보낸 편지를 받게된 오영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오빠를 찾으러 간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토록 동생을 찾고 싶어했던 오수는 동생 오영 앞에서 비명횡사한다. 그러나 오영은 자신의 눈 앞에서 오수가 차에 치어 즉사하는 것조차 볼 수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1년 후, 난데없이 자신 앞에 오빠 오수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불과 1년전, 직접 오빠를 찾으려갔다가 어떠한 남자에게 문전박대만 당한 기억이 똑똑한 오영은 자칭 오빠 오수를 믿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오영 앞에 나타난 오수는, 오영의 진짜 오빠 오수가 아니다. 그는 단지, 한글 이름만 같은 오수(조인성 분)이다. 자신의 젊은 애인(서효림 분)이 자신의 돈을 모두 오수에게 꼴아 박은 것에 앙금을 품고 있던 김사장은 한 때 오수의 첫사랑 희주와 갈등을 벌이던 조직폭력배 조무철(김태우 분)을 시켜 오수에게 78억을 받아오던지, 아님 죽이라고 부탁한다.


평소 오수라면 이를 갈고 있던 조무철은 오수에게 78억원을 마련할 단 백일간의 시간을 준다. 조무철이 준 백일동안 78억원을 주지 못하면, 오수는 조무철 손에 죽는다. 때문에 오수는 78억원 마련을 위해 가짜 오빠 행세를 하며 오영에게 접근한다. 


애초 오수가 오영 앞에 나타난 것은 순전히 돈 '78억원' 때문이다. 오영 또한 돈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한 오수의 속셈을 알고있다. 아니 오영이 앞이 보이지 않은 이후, 오영에게 접근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랬다. 자신의 돈만 관심있을 뿐, 그녀가 왜 눈이 멀었는지,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명색이 오빠랍시고 '짠'하고 나타난 오수도 그랬다. 21년만에 극적 상봉(?)임에도 불구, 애초 오영의 친오빠도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나무 수 오수는 자기가 진짜 지킬 수이라는 증명에만 힘을 쏟는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사람의 말투만으로도 그 사람의 속셈을 명확히 간파하는 오영의 귀에 오수가 거슬리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오영의 차갑고도 날카로운 비수 뒤에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서만 감내해야했던 사무친 그리움이 있었다. 오영은 엄마와 오빠가 떠난 그날부터 엄마가 그리웠고, 오빠가 그리웠다. 아니,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가 필요했다. 말로는 "사랑따윈 필요없어."를 외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임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오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조무철은 오수에게 자신이 요구한 78억원을 빨리 받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한다. 놀랍게도 오영은 생각보다 빨리 죽여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 순간 오영이 자신과 같은 여자임을 확실히 깨닫게된 오수는 결코 오영을 죽일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자기 때문에 정말로 사랑했던 여자가 죽는 것을 똑똑히 지켜볼 정도로 밑바닥까지 경험해본 적있는 오수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매번 죽음을 생각하는 오영의 돈 외에도, 그녀의 인생 자체가 서서히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얼굴을 날카롭게 스치는 겨울바람처럼  <그 겨울>의 등장인물들은 장변호사와 진짜 오영 오빠 오수(정경호 분), 오영의 유일한 친구 미라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송곳니처럼 날이 제대로 섰다.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버림과 실패라는 단어를 먼저 익힌 오수는 자신의 순간적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제칠뿐, 한번도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를 친형이상으로 따르고 유일하게 믿는 것 같은 박진성(김범 분)이 있지만, 오수 눈에 진성은 그저 걱정스러운 동생일뿐이다.  


엄마와 오빠가 자신을 떠난 이후, 누굴 믿어본 적도 믿지도 않으려는 오영은 아름답지만, 가시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한 송이의 장미다. 평생 오영의 손과 발이 되주었지만, 눈과 함께 닫혀버린 오영의 마음과 함께 자신의 마음까지 닫혀버린 왕비서도 겉으로는 강해보여도 실은 오영의 가시에 베인 상처로 아프다. 오수 때문에 자신의 언니가 죽었다는 원한에 사로잡혀있음에도 불구, 그래도 오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도는 문희선(정은지 분)이나 결국은 사랑 때문에 오수에게 이를 가는 조무철 모두 '사랑'에 고픈 사람들이다. 


이미 한국에서 영화화까지 된 원작을 굳이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시청률'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지만, <그 겨울>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실상은 사랑에 제대로 목말라있다. 다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본지가 오래라, 누굴 사랑하는 법도,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하는 지를 잊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 겨울>은 규모나 스케일 면에서 거대해졌지만, 그 이전 노희경 작가 스스로가 구축해온 인간상들과 그닥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사실 오영이 오빠 오수를 찾아 나가고, 진짜 오빠 오수가 오영 앞에서 죽었던 첫회는 영화보다도 더 황홀한 영상미와 군데군데 보이는 노희경만의 남다른 대사에도 불구, 과연 노희경 작가 작품 맞나 싶을 정도로 다소 지루하고 식상해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수와 오영이 만나고, 오영이 자신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지 않는 오수의 무심함을 탓하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게 바로 노희경이지' 말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오영에게는 지금 자신의 앞에 나타난 오수가 진짜 자신의 친오빠라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같은 피가 흐르는 생물학적 오빠가 아니라, 자신을 정말로 아끼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오빠가 주는 '사랑'이다. 오영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을 갈망해왔고, 그 사랑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행여나 현실에서 그 '사랑' 구현이 녹록지 않다면 자신들의 감정을 대변할 대리 인물을 내세워서라도, 그들의 사랑이라도 이뤄지길 바라는게 이 세상 사는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엄연히 말하면 오수는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다. 그는 오영의 돈을 보고 계략적으로 접근했고,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대로 오영의 돈만 챙기고 유유히 사라질 예정이었다. 게다가 오영은 눈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오영을 만나기 전 오수는 오영에게 있어서 결코 만나서도 안되는 최악의 남자였다. 하지만 오영을 만난 이후 그녀가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픔이 크다는 사람임을 알게된 오수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게 되고,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조금씩 터득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원작과 리메이크작 영화를 통해 비극으로 치닿는 오수와 오영의 이야기를 접한 바 있다. 동시에 "사랑 따윈 개나 줘버려." 하고 울부짖은 두 남녀가 정말로 구구절절 사랑하는 과정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원작과 거의 똑같은 설정, 소재에도 불구 노희경 손에서 재탄생한 <그겨울, 바람이 분다>는 원작은 물론, 문근영 김주혁 주연 리메이크작과도 상당히 다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어느덧 서른을 넘은 나이에 숨이 막히는 클로즈업에도 불구 여전히 자체발광하는 조인성과 송혜교의 우월한 비주얼도 훌륭하지만, 차가운 냉기가 적막하게 흐르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먼저 불러주었을 때 불연듯이 싹트는 설렘과 따뜻한 감정은 노희경만이 할 수 있는 '휴머니즘' 그 자체이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바람이 도통 꺾일지 모르는 추운 겨울날밤, 간만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사르르 녹아내릴만한 노희경표 정통 멜로 귀환이 반갑다. 거기에다가 노희경이 새롭게 재창조한 오수와 오영의 캐릭터를 십분 살리는 조인성과 송혜교가 있으니, 당분간 수, 목밤은 <그 겨울>에 제대로 저당잡히게 생겼다. 특히나 극 중반에 조인성과 송혜교의 백허그는 수많은 남녀 모두를 가슴 아프게 한다. 너무 잘어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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