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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하는 부모 심경 대변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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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에서부터 엔딩까지.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분위기는 누군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감 이다. 죽음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 되지는 않지만,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이 보이는 남자의 육체,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누군가를 추도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표정없이 그들을 맞이하는 안나(줄리엣 비노쉬 분)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아들을 잃었고, 큰 충격에 빠져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아들 쥬세페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이후, 시름에 빠져있던 안나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온다. 전화를 건 이는 아들의 전 여자친구 잔(루 드 라쥬 분)이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쥬세페에게 있던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쥬세페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안나가 살고있는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찾은 잔은 정작 쥬세페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잔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쥬세페는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않아." 라는 아리송한 말만 남길 뿐이다. 


왜 안나는 진작에 잔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들이 사랑했던 여자를 보고 싶어서? 아들의 여자친구라고 찾아온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그녀와 함께 아들이 떠난 슬픔을 함께 이겨내기 위해서? 쥬세페가 왜 그녀들의 곁을 떠났으며, 안나는 왜 쥬세페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지. 관객들에게 일일이 알려주지 않는 이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 하고도, 어렵게 다가온다. 





그런데 영화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서사의 축소는 비단 <당신을 위한 시간> 뿐만 아니라, 다음달 4일 개봉을 앞둔 <자객 섭은낭>, 올해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에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수상도 기대되어지는 <사울의 아들>에서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들꽃>, <스틸 플라워>를 만든 박석영 감독이 등장인물 행동에 대한 동기 대신,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연출을 선보이기도 했다. 픽션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극영화의 특징상 영화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서사 대신 인물의 동작, 표정, 풍경에 천착하여 움직이는 카메라의 이동은 오히려 화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폭을 확장시킨다. 


이야기를 최소화하고, 넓은 대저택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을 모르는 그의 전 여자친구의 며칠 간의 동거를 다룬 영화는 그녀들이 거니는 풍경과 공간, 그리고 서로 나누는 몇 마디의 말보다 그 사이에서 미묘하게 오가는 그들의 표정에 집중한다. 영문도 모른 채, 연락이 되지 않는 남자친구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잔의 캐릭터도 인상적이지만, 절제있는 기품을 보여주면서도, 황량감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오롯이 안나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이다. 





마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지만, 그녀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하는 그 아픔의 깊이마저 숨길 수 없는 안나의 얼굴.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야하는 이의 슬픔도 크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하는 부모의 심정에 비할 수 있을까. 쥬세페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잔에게 그 상처를 숨기기 위해 더 밝게 웃는 안나의 얼굴은 아름다운 섬 시칠리아의 대저택 에서 홀로 남게된 그녀의 현실과 대비되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안나는 끝까지 자신의 상처를 잔에게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안나는 쥬세페가 떠난 아픔을 홀로 감당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고 한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모두가 원하는 극적인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힘들게 짊어지고 가야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는 것. 그런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공허한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지금 이순간에도 누군가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오랜 시간 잔상에 남을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신예감독 피에로 메니나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1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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