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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의 든든한 버팀목 되어주는 할머니 윤여정이 선사한 따뜻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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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코로나19 여파로 극장가가 역대 최악의 침체기를 겪는 와중에도, 독립영화 흥행 기준인 일만관객을 돌파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의 주인공 찬실(강말금 분)은 그녀와 함께 영화를 만들던 지감독이 급사를 하자 모든 것을 잃고 산동네로 이사를 간다. 

새로 이사간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분)와 대면한 찬실은 왠지 모를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찬실이가 기거할 옆 방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할머니. 도대체 찬실이 방 옆 방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할머니집 건넌방에 기거하는 아주 유명한 귀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귀신(김영민 분)은 집주인 할머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직 찬실이의 눈에만 보인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어릴 적에는 여자가 글 배우면 바람난다고 학교도 안 보냈어.” 

하나 있던 딸도 먼저 보내고, 글 읽어줄 사람이 없어서 갑갑한 마음에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는 찬실이와 친해지기 전 만해도 “그 나이 먹도록 시집도 안가고 뭐했어?”,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한 사람도 몰라.” 등 그녀의 속을 박박 긁어놓기도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찬실이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어준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 정이 깊은 할머니는 점점 야위어가는 찬실이가 보기 안쓰러운지 종종 따뜻한 밥상을 차려 준다. 가는 정이 있다면 오는 정이 있듯이 찬실이 또한 할머니의 한글 선생님을 자청한다.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든든한 지주목이 되어주는 노년 여성과 중년 여성의 연대. 그간 한국에서 정말 보기 드물었던 따뜻한 장면이다. 

 


“글이라고는 이름 세 글자 밖에 모르는 완전 시골 촌할매였는데도 사는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아요. 마음대로 라는게 애당초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거 같기도 하고…”

마음에 두고 있는 후배 영(배유람 분)과 함께 공원에서 환하게 웃는 할머니들을 우연히 마주친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까먹고는 못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찬실이가 유독 주인집 할머니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지만, 사는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았던 자신의 할머니가 떠올라서 그녀에게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감독이 죽은 이후 평생 천직이라고 여기던 영화일도 못하고 이래저래 상처를 받은 찬실이가 주인집 할머니에게 만큼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래도 포용할 수 있는 할머니의 따뜻한 성품 덕분이었다. 

찬실이를 알기 전 만해도, 찬실이의 까맣게 타 들어간 속도 모르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가 싶었던 할머니는 “(그 나이 먹도록 시집도 안가고) 영화 했어요.”라는 찬실의 대답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후에도 할머니는 찬실이와 함께 한글을 익히고 콩나물을 다듬는 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찬실이의 일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인생선배’로서 그녀를 가르쳐들려하지 않는다. 

“하던 일은 왜 관뒀어?” “오랫동안 같이 일하던 감독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일을 못하는구먼.” 

찬실이와 함께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조심스레 그녀가 일을 그만둔 이유를 물은 할머니는 “제가 하고 싶다고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구요.”는 말에 “아직 젊으니까 뭐든지 하면 되지.”라며 격려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늙어서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대신 오늘 하고 싶은 일만 애써서 한다는 말을 남기며 뭉클한 감동을 남긴다. 

이외에도 주인집 할머니는 마음에 두고 있던 영에게 차이고 더욱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 찬실이에게 본인이 직접 쓴 시 한 구절로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등 무심한 듯 살뜰하게 찬실이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준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찬실이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할머니 역에 대배우 윤여정이 맡게된 계기는 김초희 감독과의 오랜 인연에서 비롯된다. 김초희 감독이 홍상수 감독 영화 프로듀서로 활약할 당시 깊은 친분을 쌓았던 윤여정은 이후 김초희 감독이 영화를 그만두려고 할 때 사투리 연기 강습을 제안하며, 김 감독이 다시 영화를 시작할 수 있게끔 힘이 되어준 일화로 유명하다. 

“내가 60살을 넘어서부터는 사치를 하려고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사치라는게 뭐냐면 그냥 돈이건 역할이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작업을 하면 그냥 하는거다. 김초희라는 사람이 좋았고 그래서 하게 됐다"

지난 2월 17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윤여정은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김초희 감독의 재능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며, 그녀를 향한 공개적인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프로듀서를 그만두고 오랜 부침에 시달렸다던 김초희 감독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승화시킨 멋진 데뷔작을 만든 것은 영화 속 찬실이의 주인집 할머니처럼 김 감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배우 윤여정의 존재감 또한 돋보인다. 

이 시대 모든 찬실이들의 세삼하고 따뜻한 할머니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윤여정의 열연이 돋보이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극장가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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