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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러브레터(1995)' 본의 아니게 빌런이 된 남성 캐릭터들. 그럼에도 짙은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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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元気ですか!!! 私は元気です!!!(잘 지내나요!!!저는 잘 지내요!!!)"

 

매년 겨울이 되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곁을 찾아오는 영화가 있다. 무려 1995년에 만들어졌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말이다.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부터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지만, 정작 자국인 일본에서는 그리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러브레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이 영화를 찾는 한국 관객들로 인해 꾸준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고 첫사랑, 겨울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22년 겨울에도 어김없이 재개봉을 통해 한국 관객들을 찾은 <러브레터>. 수많은 이들의 인생영화라고 하는 이 영화. 허나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영화라 그런가. 2022년 관점에서 봤을 때 <러브레터>는 어딘가 모르게 올드한 구석 투성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불편함은 단연 여주인공을 대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설정이다. 분명 그 당시에는 츤데레(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캐릭터로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겠으나 2022년을 살고 있는 동아시아 관객들이 봤을 때 <러브레터>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면서도 가스라이팅 면모가 강해보인다. 

 

 

이 영화가 초기 공개될 당시만에도 많은 이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았을 시게루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 분)는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가 먼저 남자 후지이 이츠키보다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를 먼저 좋아했고 때문에 남자 이츠키가 죽은 이후에도 히로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잘 알려지다시피 히로코의 전 약혼남이었던 남자 이츠키는 아키바 일행과 산행 당시 조난을 당해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은 지 3년이 지나도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 못지 않게, 아키바 또한 이츠키의 죽음에 대한 강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게 자기 뜻대로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히로코와 거리를 두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아키바의 심정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키바의 히로코를 향한 구애방식이 다소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시대가 변해서 그런 것일까. 아직 전 연인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사람을 잊고 나를 사랑해줄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심지어 히로코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편지까지 자기 마음대로 보내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설정은 제 아무리 극적 전개상 필요한 긴장과 갈등 유발을 위한 장치였다고 한들, 2022년 <러브레터>를 새롭게 보고자하는 관객들에게 무한 찜찜함을 안겨준다.

 

'あ- 私の戀は南の風に乘って走るわ(아~내 사랑은 남풍을 타고 움직여요)' -남자 이츠키가 죽어가는 순간 불렀다던,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 가사-

 

허나 <러브레터>에는 히로코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아키바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남성 캐릭터가 있었으니, 3년 전 조난사고로 죽은 히로코의 약혼남 남자 후지이 이츠키다. 중학교 시절 이름이 같은 동급생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사카이 미키 분)을 짝사랑했던 남자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 분)는 첫사랑의 강렬한 기억 탓에 여자 이츠키와 너무나도 쏙 빼닮은 히로코와 연인이 되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히로코에게 적잖은 허탈감을 안겨준다.

 

 

물론 남자 이츠키가 히로코와 결혼까지 결심한 건 단순히 그의 첫사랑이었던 여자 이츠키를 닮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히로코가 어쩌면 남자 이츠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 가사에 따르면 일본의 남쪽 고베에 살았던 남자 이츠키는 여전히 일본 북쪽 훗카이도 오카루에 살고 있는 여자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걸로 추정된다.(이거는 어디까지나 감독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추측일 뿐이다) 

 

 

자기와 함께 산을 타다가 죽은 후배의 연인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구애하는 남자와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 어린시절 첫사랑을 품에 안고 세상을 떠난 남자. 2022년 기준에는 다소 발암 캐릭터로 느껴질 수 있는 남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러브레터>가 끊임없이 회자되고 변치않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구현하고자하는 세계관과 메시지 덕분이 아닐까. 익히 알려진대로 <러브레터>는 3년 전 죽은 약혼자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가 우연찮게 남자 이츠키와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와 편지로 교신하며 서로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극중 히로코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자 이츠키를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으며,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와 같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히로코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 여자 이츠키에게 중학교 3학년 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의 죽음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듯하다. 어쩌면 아버지를 잊고자 그 당시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하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만 치환되던 여자 이츠키에게 중학교 시절 이름이 같아 곤욕스러웠던 추억을 많이 남겼던 남자 이츠키의 약혼녀의 편지는 <러브레터>의 부제와도 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실마리다. 

 

 

여전히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를 향한 삐뚤어진 연심에 사로잡힌 아키바의 방해공작에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지만, 오해를 풀고 편지로 깊은 교류를 나누게 된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를 함께 추억하고 기억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죽은 연인에게서 도통 헤어나오지 못했던 히로코는 그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고, 반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중학교 시절 좋았던 기억이 거의 없었던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와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그녀의 과거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미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여자 이츠키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동급생에 관한 기억까지 떠안게 되는 설정이 어떻게 보면 여자 이츠키에게는 가혹한 짐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당시 좋았던 기억에 대한 마음의 문까지 닫아놓고 살았을 여자 이츠키가 자신을 남몰래 좋아했던 남자 이츠키와의 추억을 통해 청소녀 시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억하게 될 수 있는 건 그리 나쁜 전개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러브레터>는 죽은 지 10년이 지나도 아버지(혹은 아들, 남편)의 죽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여자 이츠키 가족들이 10년 후 반복된 위급 상황에서 무사히 이츠키를 살려내는 전개를 통해 강한 여운을 선사한다. 이렇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과거 아팠던 기억과 마주하고 조금씩 그날의 상처에서 회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러브레터>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많은 관객들의 필감 영화로 거론되는 것이 아닐까. 2020년대 관점에서 보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남성 캐릭터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다시금 살아나갈 수 있음 힘을 안겨주는 영화 <러브레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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