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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와 함께 인생영화 찍은 정재영과 김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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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유준상, 이선균, 김상중, 윤여정, 문소리, 고현정, 정유미, 이자벨위페르, 카세료 그리고 지난 24일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정재영, 김민희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당대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무보수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굳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상수 감독은 김기덕 감독과 더불어 칸, 베니스, 베를린이라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 꾸준히 초청되는 몇 안되는 한국 감독이다. 최근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제68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격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명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준다는 것이 유명 배우들이 앞다투어 홍상수 영화를 찾는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의 대충 큰 틀만 잡고, 그날 촬영할 구체적인 씬 시나리오는 당일 아침에 쓰는 걸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제작 방식 덕분에 홍상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배우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홍상수 영화 초창기에는 김상경, 김태우가 돌아가면서 주연을 맡았다면, 최근 홍상수 영화의 대표적인 얼굴은 유준상과 이선균이다. 여주인공으로는 주로 문소리, 예지원, 정유미가 등장하며, 주인공 엄마나 중년 부인 역할은 대부분 윤여정의 몫이다. 여기 기주봉, 김의성, 서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누가 홍상수 영화 아니랄까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도 유준상, 윤여정, 기주봉, 서영화 등 대표적인 홍상수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각각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들이 참 낯설다. 정재영은 <우리선희>(2013)에서 홍상수 감독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지만, 김민희는 이번 영화가 홍상수 영화 첫 출연이다. <우리선희>에서 김상중, 이선균과 더불어 선희(정유미 분)을 흠모하는 세 남자 중 한 명이었던 정재영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김민희와 함께 극을 오롯이 책임져야하는 단독 남자주인공으로 승격(?)된다. 


이미 <우리선희>에서 연이은 치킨 드립으로 예사롭지 않은 포텐을 터트린 정재영은 이번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작심이라도 한듯이 <우리선희> 때보다 한층 농익은 능청 연기를 마음껏 구사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정재영이 보여준 모든 장면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희정(김민희 분)은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KBS <어셈블리>에서 보여준 열연과 더불어 정재영의 인생연기로 꼽을 만하다. 





정재영만 인생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다. 함춘수(정재영 분)의 혼을 쏙빼놓은 매력녀 희정으로 분한 김민희 또한 홍상수 영화의 출연은 그녀에게 새롭고도 즐거운 이색 경험이었다. 비주얼만 예쁘게 나온 것이 아니라, 희정이 보여주는 행동 하나하나가 예쁘고 빛이 난다. 희정을 꼬시기 위해 안달이난 춘수를 애닮게하는 희정의 간들러지는 목소리와 애교는 배우 김민희의 저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1,2부로 나뉘어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는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홍상수 감독은 1부를 촬영한 이후 2부를 정재영, 김민희 두 배우에게 맡기는 실험을 강행한다. 그 결과 홍상수 감독과 정재영, 김민희가 함께 만든 2부는 1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다. 





촬영 당일에서야 그날 찍을 시나리오를 건네는 악명 높은(?) 감독임에도 불구, 홍상수와 작업했던 배우들이 다음 작품에서도 무보수에 가까운 출연료만 받고 또다시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홍상수 만의 독특한 작업방식에서 오는 힘 때문이다.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캐릭터에 몰입해야하는 여타 극영화와는 달리 홍상수 감독은 배우 개개인의 평소 말투, 습관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그에 따라 배우가 맡을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때문에 배우는 시나리오의 대사를 모두 외우지 않아도, 캐릭터를 세세하게 분석하지 않아도, 그가 맡은 배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물아일체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배우들에게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며, 유명 배우들이 계속 홍상수 감독을 찾게 하는 이유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표현하는 차원이 넘어, 배우 자신의 실제 모습이 어느정도 반영된 캐릭터를 감독과 함께 만들어가야하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은 배우로서는 다소 꺼러질 만한 새롭고도 낯선 도전이다. 그러나 이전 홍상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인상깊은 열연을 펼쳤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는 배우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장진 혹은 강우석의 남자로 이미지가 고착화되었던 정재영이 <우리 선희>를 통해 배우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찍어놨듯이, 예쁜 모델 출신에서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한 김민희에게 홍상수 영화는 그녀의 넓고도 깊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무대다. 


매 작품마다 들뢰즈의 ‘반복과 차이’를 영상으로 구현해오던 홍상수 감독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숨겨진 차이의 미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펼쳐내보인다. 그러나 굳이 들뢰즈의 어려운 이론을 대입하여 매 씬의 숨어있는 의미를 분석하려 들지 않아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극이 진행될 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정재영, 김민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김민희와 더불어 홍상수 영화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고아성, 최화정의 등장도 반갑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촬영 이후 드라마 <어셈블리>에 출연한 정재영은 시청률과 관계없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명열연을 펼쳤고, 김민희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통해 또다른 인생 영화를 예고케한다. <우리 선희>에 이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연이은 출연으로 정재영을 홍상수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부를 법도 하지만, 다음 차기작은 이미 뉴페이스 김주혁과 크랭크업까지 마쳤다고 한다. 


만날 등장하는 배우만 나오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늘 변화가 감지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정재영과 김민희가 그랬듯이 인생영화 찍었을 김주혁의 변신이 벌써부터 기대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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