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전망대

시사채널 창.수십년 만에 빛을 보게된 삭제된 필름. 2016년 우리들에게 건네는 무언의 메시지

반응형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고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영상자료원은 이만희 영화 필름을 정리하던 중, 그동안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의 필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간 이만희 감독 필모 그래피에도 없던 영화, <휴일>의 등장에 당황한 관계자들은 필름 시사회 이후 1968년에 만든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에 더 크게 놀라게 된다. 


그런데 수십년간의 세월의 간격을 가뿐히 뛰어넘을 정도로 매혹적인 완성도를 보여준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렸던 이유가 더 놀랍다. 1968년 당시, 검열 당국은 <휴일> 우울한 분위기를 지적하며,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하는 결말 대신, 주인공이 머리를 깎고 군대를 가는 것으로 바꾸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만희 감독과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는 검열 당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아예 영화 상영을 포기하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그래서 <휴일>은 37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완성도를 지킬 수 있었다.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 무료로 옛날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 외에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하고 있는 주 업무는 한국고전영화의 필름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이 보관하고 있는 필름을 관리하는 일 외에도, 국내외에 흩어져있을 사라진 필름을 찾아 발굴하는 것 또한 한국영상자료원의 대표 사업 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화인들이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 필름을 찾는 일 외에도,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필름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작년만 해도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 최하원 감독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8) 등 많은 필름이 연이어 발굴 되며, 해당 영화들이 영상자료원 자체 시사회 및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섹션을 통해 공개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이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은 지난 16일에 방영한 KBS 1TV <시사채널 창-독점발굴 삭제된 필름...빛을 보다>에서 방영한 것처럼, 과거 검열 당국에 의해 삭제된 필름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이날 방송한 <시사채널 창>에 따르면 60년대 후반부터 강화된 영화 검열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이만희 감독이다. 단지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던 <7인의 여포로>(1965)을 시작으로, <휴일> 개봉 금지 조치 등 이만희의 영화 역사는 검열로 얼룩 졌었다. 





그런데 당시 검열 당국이 유독 이만희 감독 에게만 가혹 했던 것도 아니다.  방송 인터뷰에 응한 김수용, 이장호 감독 등은 물론 그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모든 영화감독들이 검열 당국의 서슬퍼런 가위질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영화 검열은 1999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본격적으로 위헌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고, 미풍 양속을 지키고, 건강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수많은 필름들이 무수히 잘려 나가야 했다. 


물론 이 중에는 과도한 노출 장면 때문에 잘려나간 필름이 상당수다 . 하지만 당시 검열관들은 낯뜨거운 장면이 없어도, 국가관에 저촉될 법한 장면이 있으면 삭제조치를 가했다. 그래서 1975년 청춘들의 우울한 현실을 담아낸 고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원본의 절반이 잘려나간 너덜너덜한 상태로 관객들과 만나는 이상한 영화로 남아야했다. 당시 국가가 지향하는 밝고 명량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이 아닌, 무기력한 청춘들의 일상을 사실감있게 보여주었다는 이유 였다. 그렇다고 <바보들의 행진>이 당시 불합리한 체제와 맞서 싸우는 대학생들의 투쟁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은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삭제 조치 당했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잘려나간 장면들은 지금 상식으로 볼 때, 전혀 문제없는 씬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기들이 공을 들여 영화가 검열 당국의 가위질로 이상한 영화로 남기보다, 차라리 그들 외에 아무도 모르는 훌륭한 영화로 남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이만희 감독과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는 그들 스스로 <휴일> 상영을 포기한다. 하지만 서슬퍼런 검열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혼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이만희 감독도 결국은 현실과 타협해야했고, 그의 유작 이었던 <삼포가는 길>(1975)은 감독의 절실한 바람과 다르게,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업적을 찬양하는 일종의 계몽 영화로 끝을 맺게 되었다. 


수십 년 만에 검열관에 의해 잘려나갔던 필름 들을 다시 보게된 김수용, 이장호 감독은 깊은 상념에 빠진다. 검열당국의 거듭된 가위질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던 김수용 감독은 1987년 <중광의 허튼소리>를 끝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 했었고, 뛰어난 감독들이 즐비 했던 60~7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도 유독 재능이 돋보였던 이만희와 하길종은 그들의 예술혼을 제대로 꽃피어 보지 못한 채, 일찍 유명을 달리해야했다. 그들과 달리 살아남은 감독들 또한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꼽히는 1960년대 초 때만큼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당시 ‘검열’로 대표되는 표현의 자유 억압이 활황기를 맞고 있던 한국영화의 절대적인 몰락을 자초한 것이다. 





지금은 70~80년대와 달리 사전 검열 제도도 폐지 되었고, 영화가 화면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도 어느정도 보장되고 있는 만큼, 영화가 상영되기 전 몇몇 장면이 잘려나가는 일은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먼 옛날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힘들게 영화를 만들어도, 시장 논리에 맞지 않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있으면 상영의 기회를 쉽게 주지않는다는 것이 영화 제작자, 감독들을 위축시킨다. 


관객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일찌감치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배제를 당하고, 유명 배우들을 앞세운 특정 투자, 배급사 영화가 전체 상영관의 70~80%를 장악하는 현실에서,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가 아닌, 대기업 투자, 배급사들의 입맛에 맞고, 관객들이 많이 보러올 것 같은 영화만 만들게 된다. 2000년대 초, 다양한 소재와 장르의 등장으로 산업의 질적 발전을 이룬 한국 영화가 점점 획일화 되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고발한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한 이후, 지난 20년간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자리가 위태로워 지게 된 일련의 과정들은 정치적 논리를 떠나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영화인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작년 10월부터 영화진흥위원회가 추진하고 있고, 영진위가 선정한 위탁단체가 정한 영화만 틀 수 있다는 새로운 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 사업계획은 수많은 독립 영화인들의 반발을 초래함은 물론, 그나마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의 숨통마저 조이게 한다. 그렇게 영진위의 지원이 끊긴 사이, 독립예술영화관  ‘씨네코드 선재’,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 연이어 문을 닫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였다. 


과연 2016년을 살고 있는 영화인들은 그래도 70-80년대보다는 원활한 제작 환경과 정부 지원 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사수하며,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영화 개봉 전 사전 검열 제도는 사라졌다고 하나, 정부가 지원하는 예산을 삭감, 폐지하거나, 극장 혹은 영화제 상영을 어렵게 하는 방식으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한, 차단시키는 요즘같은 현실에서,  검열 당국의 가위질 때문에 정상적인 창작 활동이 어려웠던 70-80년대 감독들의 이야기는 그저 옛날에 있었던 참담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수십년 만에 빛을 보게된 당시 영화 검열 기록과 삭제된 필름들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무언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