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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사울의 아들. 극한의 사운드로 느껴지는 홀로코스트의 공포. 이것은 영화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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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기수 장 뤽 고다르는 자신의 대표작 <영화사>(1997)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1940년대 활동한 감독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비극을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외면했고, 그 현실 또한 영화를 버린다. 그리고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1955)를 통해서야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지난해 제 68회 칸영화제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다. 칸영화제를 비롯해, 전세계 유수 영화제가 이 작품을 주목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 영화의 제작방식이다. 


<사울의 아들>의 주인공 사울은 수용소 내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존더코만도’이다. 그 역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었고, 나치에 의해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포로다. 죽을 날만 기다린 채, 나치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유대인들의 학살 임무를 수행하던 사울은 우연히 엄청난 시체 더미 속에서 오래 전에 헤어진 아들을 만난다.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아들의 장례를 치뤄주고 싶었던 사울은 다른 일도 제쳐두고, 장례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랍비를 찾는다. 


하지만 동료 존더코만도들이 처형을 앞두고, 수용소 관리들을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랍비 찾다가, 동료들의 계획을 그르치는 사울의 행동은 엄청난 민폐만 끼친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애꿎은 존더코만도 여럿이 목숨을 잃는다. 그 와중에도 사울의 머릿 속에는 온통 아들의 장례와 랍비 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러온 유대인들이 화마 속에서 비명횡사 해도, 사울의 감각은 오직 랍비를 찾는 것에만 꿈틀거린다. 





옆 사람이 죽던 말던 아들의 장례에만 집착하는 사울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아우슈비츠는 애시당초 상식이 말살된 비상식의 공간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것에도 모자라, 같은 유대인들에게 그 시신들을 처리하게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존더코만도 또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다. 그 중에는 몇몇 존더코만도 들처럼 반란을 계획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존더코만도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 응당가지는 모든 감정을 스스로 파괴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 죽을 수도 있기에,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시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무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학살 장면이 사울에게는 그저 매 순간마다 겪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시체 치우는 기계처럼 살았던 사울이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그동안 가슴 깊숙이 눌러 왔던 감정과 욕망을 되찾게 된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장례를 잘 치뤄주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가지는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 광기의 중심에서, 탈출을 위한 동료들의 집단 행동에 참여하는 대신, 랍비 찾기 에만 열중하는 사울의 부성애는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객기로 남는다. 





아들의 죽음 때문에 욕망은 되찾았지만, 이성적인 판단 기능은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울은 아들의 장례, 랍비 외엔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비명 소리도 사울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은 4:3이라는 좁은 화면 비율에 각이 좁은 렌즈를 활용하여 아들의 죽음 외엔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울의 좁은 시야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자연스레 사울의 주변에 내뒹구는 참혹한 시체들은 그것들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사울의 시선에 따라 흐릿하게 보여진다. 대신 스크린 너머로 들리는 사운드를 통해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끔찍한 현실을 기억하고자 한다. 


사울 때문에 힘들게 계획한 반란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 동료 존더코만도들은 사울을 원망하며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 때문에 산 자들을 버리다니.” 하지만 그에 대한 사울의 답은 명확하다. “우린 이미 죽었어.”  도무지 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었던 사울에게 아들의 장례를 잘 치뤄주고 싶은 그의 이기심을 탓하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서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싶었던 사울의 무모한 투쟁은 그 당시 영화가 애써 외면했던 비극을 고발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학살의 참혹한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사운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려주기 방식으로 마치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영화는 단순히 관람이 아니라 새로운 체험으로 영화적 의미를 확장시킨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은 죽은 자들을 빌러 산 자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 생생한 사운드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통해, 끔찍했던 지난날 로만 인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각인시키는, 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책무를 등지면 안되는 영화의 소명 이자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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