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열린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 관객과 처음으로 만났던 <레이디 맥베스>(2016, 윌리엄 올드로이드 연출)의 첫 시작은 단조롭지만 강렬하다. 이제 막 레스터 가문의 안사람으로 발을 디딛기 시작한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은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캐서린 남편의 얼굴은 도통 비춰주지 않는다. 




이윽고 결혼식을 올린 교회에서 캐서린과 남편이 살게될 방으로 공간이 이동하는데 그제야 남편의 얼굴이 나온다. 하지만 캐서린의 남편은 그녀에게 도통 관심이 없다. 집밖으로 나가게 하지도 못하게 할 뿐더러, 오직 자신을 향한 복종만 강요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땅 몇 마지기에 아내로 팔려온 캐서린은 말이 좋아 레스터 부인이지 꼼짝없이 집에 갇혀있어야하는 고급 노예다. 


연일 자신을 억누르는 일상에 지칠 대로 지친 캐서린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그들과는 달리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 분)과 눈이 맞는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꾹꾹 눌러 왔던 욕정을 세바스찬을 통해 해소한 캐서린은 더 큰 욕망과 자유에 눈 뜨게 되고, 자신의 행복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연이어 살해한다. 캐서린을 괴롭히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캐서린의 살인 본능은 쉽게 지칠 지 모른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소녀 캐서린은 어느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도 죽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원작으로 한 <레이디 맥베스>는 원작에서 기본적인 설정을 따왔을 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전개된다. 원작의 주인공 카테리나 리보브나 부인은 시아버지, 남편, 남편 조카를 살해한 혐의로 그녀의 정부 세르게이와 시베리아로 유형생활을 하던 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반면, <레이디 맥베스>은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보여 준다. 그래서 원작보다 더 소름 끼치게 다가 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작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 <레이디 맥베스>만의 주제 의식을 확고히 한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 자신의 욕망에 무너져 시아버지, 남편, 남편의 조카까지 살인하는 카테리나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면, <레이디 맥베스>는 캐서린이 시아버지, 남편에게 받았던 억압과 고통이 고스란히 치정과 악행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교적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렇다고 캐서린이 저지른 잔혹 범죄가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종일관 캐서린을 둘러싼 음습하면서도 답답한 공기는 스크린 밖 관객들의 숨까지 탁 막혀버리게 한다. 미치거나 죽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수 없었던 캐서린의 삶이었다. 어쩌면 캐서린 스스로가 벌인 악행들은 그녀를 위한 일종의 ‘최선’이었다. 


유독 카메라의 움직임이 많지 않은 <레이디 맥베스>는 픽스(고정) 샷을 통해 카메라에 잡히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한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디 맥베스>는 18세기 잉글랜드의 외딴 시골 성이라는 고풍적인 배경 하에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회화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안겨 준다. 감독의 철저한 계산 하에 완성된 미쟝센은 캐서린의 억눌린 상황을 더욱 극대화 시킨다. 자연스레, 캐서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서사와 연출은 캐서린의 시선에서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행동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캐서린은 여성에게 복종과 헌신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모순에 의해 인권이 유린된 희생양이다. 캐서린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하녀 또한 철저히 그녀의 원래 주인인 캐서린의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를 뿐, 어느누구 캐서린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연스레 캐서린은 삐뚤어 지기 시작했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이 되었다.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캐서린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캐서린을 악녀로 만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억압된 환경이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위해와 억압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여자의 잔인한 운명을 극적으로 담아낸 <레이디 맥베스>는 올해 7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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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서울독립영화제 2016 개막작으로 선정된 <재꽃>은 <들꽃>(2014), <스틸플라워>(2015)를 이은 박석영 감독의 ‘꽃’ 삼부작입니다. 하지만 전작들을 보지 않아도 <재꽃>을 보는데 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시리즈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 작품 모두 별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물론 삼부작의 연계고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박석영의 꽃 삼부작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인물은 배우 정하담이 연기하는 하담입니다. 여기에 <재꽃>에서는 하담이의 미니미를 보는 것 같은, 하담이를 쏙 닮은 해별(장해금 분)이 등장합니다. 트렁크 하나 달랑 끌고, 엄마가 아빠라고 알려준 명호(박명훈 분)을 찾아온 해별과 하담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봅니다. 언제나 혼자 였던 하담에게 친구 혹은 가족이 생긴거지요. 


그러나 해별이 찾아와서 마냥 좋은 하담과 달리, 해별의 등장으로 하담의 주변 인물들은 차례차례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하담 또한 그 붕괴의 도미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들꽃>, <스틸플라워>에서도 그랬듯이 박석영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 그들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쉽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하담 혹은 해별이 힘겹게 자기가 머무를 수 있는 영역을 확보했다 싶으면, 여기는 너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면서 매몰차게 쫓아냅니다. 그래서 박석영의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잔인하고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스틸플라워>에서 하담을 몰아세운 것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요. <재꽃>은 그런 하담에게 그녀와 똑 닮은 해별이를 만나게 해주고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하는 하담 그리고 해별이를 조금이라도 행복한 모습으로 보내고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하담, 해별 외에도 <재꽃>에는 명호, 진경(박현영 분), 철기(김태희 분), 철기 엄마(정은경 분)이 등장합니다. <재꽃>은 하담이와 해별이만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명호, 철기, 진경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극영화에서 자주 보여지는 실수 중 하나가 특정 인물 외의 나머지 인물들이 주변화로 머무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인데, <재꽃>은 워낙 등장 인물들이 적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각 인물들이 영화 속에 박제된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살아 숨쉬는 듯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을 실존 인물처럼 받아들이고 자꾸만 그들의 삶에 끼어뜰고픈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박석영 감독 영화가 가진 장점이기도 합니다. 


인물의 움직임과 공간을 적절하게 활용한 장면들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미지로 세계를 구현하는 예술이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반면 아쉬운 부분도 분명합니다. 영화 초반부 컷과 컷의 이어짐이 부자연스럽다 못해 뚝뚝 끊어지곤 하는데, 편집상 실수인 것인지 아니면 감독이 의도한 바 인지 의문을 들게 합니다. 영화에 총 세번 배경 음악이 등장하는데 감정 몰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된 듯한 음악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후반부 갑자기 모든 것이 정리되는 듯한 시퀀스도 호불호가 엇갈릴 것 같구요. 


이렇게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재꽃>은 영화가 가진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는 작품입니다. 캐릭터가 가진 힘이라고 할까요? <스틸플라워>의 하담이가 어떻게 지낼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재꽃>의 하담이와 해별이의 앞날이 괜스레 걱정됩니다. 이제 박석영 감독의 꽃 삼부작이 마무리된 만큼, 하담이도 해별이도 떠나 보내야겠지만, 자꾸만 그들을 붙잡아 두고 싶네요. 요즘 한국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캐릭터에 생동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인물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목하게 하고,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흔치않는 작품입니다. 올해 서독제 상영을 통해 관객들 앞에 선 박석영 감독의 ‘꽃’ 삼부작 완결판 <재꽃>이 언제 정식 개봉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다시 한 번 관객들 앞에 선보일 기회가 있으면 꼭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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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변화를 싫어한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한 때 우리가 진리가 믿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허무맹랑한 주장이 될 수 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은 시간이 지날 수록 달라지는 상황을 몸서리치게 겪는 중이다. 그녀는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찬 유능한 철학교사이며, 나탈리의 남편 또한 명망높은 철학교수다. 




그렇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던 나탈리의 삶은 어느덧 서서히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모델이었던 나탈리의 어머니는 외로움에 사무친 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고, 영원히 나탈리를 사랑할 줄 알았던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며 이혼을 선언한다. 고등학교 철학교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나탈리의 철학책은 시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출판사로부터 개정을 거절당하고, 새롭게 출판되는 교과서의 집필진에서도 탈락된다. 


영원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나탈리의 품에서 떠나게 되고,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탈리는 철학교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젠가 학교에서 퇴직할 것이며, 성인이 된 자식들은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젊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제자 파비엥과 비교할 때, 나탈리는 보수적이고 변화를 싫어하고, 자신만의 생각에 갇힌 한물간 철학자이다. 




그러나 나탈리는 급변하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해, 억지로 몸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나탈리는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달라지고 다가오는 새로운 것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여전히 그녀는 풍부한 철학적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며, 살면서 터득하고 쌓아온 신념을 바탕으로 그녀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한 사람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관, 믿음 또한 변할 수 있다고 하나, 근본까지 쉽게 바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늘 제 뜻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없고,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은 언제나 괴롭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이상이지만, 더 나은 세계와 나를 꿈꾸며 바라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은 아닐까. 극 중,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몸소 받아들이기 시작한 나탈리는 수업 중 알랭의 <행복론>을 인용하며,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라는 말을 전한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자신있게 행복론을 제시하는 나탈리 또한 매일 밤마다 사무치는 외로움과 우울함에 눈물을 흘리고, 자신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을 자연스럽게 늘어 놓는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엄마, 남편, 아이들, 철학 교사로서의 명성을 다 떨쳐버리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온전한 자유를 찾았다고 하지만, 나탈리는 여전히 온전한 자유를 경험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온전한 자유를 찾기 위해 매순간 다가오는 것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 잘 살아갈 거예요.” 


완벽한 이상을 이루고 살 수는 없다. 다만, 이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나탈리는 앞으로 그녀의 삶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행복하다고 믿는 순간 그 행복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그럼에도 나탈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괴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주어진 상황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머리만 들어도 지근지근 아파오는 철학도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삶의 방편이며,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도, 가질 수도 없고, 소중히 여겼던 것들도 언젠가 떠나보내야하는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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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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