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아내, 자식이 큰 일을 당했다는 데,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초연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대응을 보여주며, 쌍문동 동네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샀던 봉황당 최무성도 자식의 사고 앞에서는 아버지였고, 사람이었다. 





tvN <응답하라 1988>은 다른 드라마와 달리, 보통 사람들은 알 턱이 없는 상류 계층의 특별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1980년대를 살았던 다수의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중에서는 복권 당첨으로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김성균, 라미란 부부 같은 사람들도 있고, 최택(박보검 분)처럼 천재 바둑기사로 유명한 스타도 있지만, 돈이 많아졌다고 해서, 부자들만 모여사는 동네로 이사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어려움을 함께 견뎌낸 동네 주민들과 오손도손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균, 라미란 부부는 졸부임에도 불구,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려 들기 보다, 오히려 살림살이가 팍팍한 이웃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은 쌍문동 동네 주민들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함께 사는 삶'을 보여 준다. 





웃을 때 함께 웃고, 울 때 함께 울고,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할 줄 아는 쌍문동 사람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보통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은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따뜻한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중 누군가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던 일도 마다하고 한걸음에 뛰어 나간다. '오지랖'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이웃을 걱정하는 쌍문동 동네 사람들에게는 '진심'이 있었다. 


지난 18일 방영한 13회에서, 아들 택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오보 기사를 접한 이후, 이성을 잃고 울분을 터트린 최무성에게도, 건강 검진 결과가 걱정되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이일화의 곁에도, 항상 그들의 곁을 지키는 가족 외에도 마치 내 일처럼 걱정해주고,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웃 사람들이 받은 고통에 구구절절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남에게만 생기는 비극이 아닌,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자식 키우고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웃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는 마치 내 일인 마냥 함께 걱정한다. 그리고 단순히 걱정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고자 한다. 


매회 가족간의 사랑과 화합을 강조하는 드라마라고 하나, <응답하라 1988>은 누군가가 처한 고통과 아픔을 개인 혹은 가족의 문제로만 다루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할 숙제로 풀어낸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은 가족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지향하는 드라마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부제를 통해 아버지들의 애환을 극적으로 그려냈다고 하나, 결국 그들도 사람이었고,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위에서 여기저기 벌어지는 일들을, 오롯이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극복해야할 사사로운 문제로 규정하기 보다, 그들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귀 기울여주고, 다시는 그런 아픔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 지금 우리에게는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사람들이 보여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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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케이블 드라마 명가로 우뚝선 tvN 내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시리즈로 평가받는 <응답하라> 시리즈 이지만, <응답하라 1988>은 지난 시리즈와 비교해봐도, 가장 잘 된 3부작으로 평가받을 듯하다. 단순히 13,8%(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가구, 전국 기준)에 육박하는 시청률 때문만은 아니다. 소포모어 징크스, 전작 뛰어넘는 속편 없다는 말도 <응답하라> 시리즈에게는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이 시작되기 전, 드라마를 이끄는 메인PD인 신원호는 “이번 시리즈는 힘들 듯.” 하면서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를 연이어 성공시킨 자만이 할 수 있는 겸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코 낙관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유는 드라마 자체보다는 편성 시간에 있었다. 2013년 <응답하라 1994>의 성공 이후, 금, 토요일 저녁 타임은 tvN이 주력해서 미는 드라마들이 대거 편성 되던 황금 시간대이다. <미생>도 그렇고, 최근 tvN에서 방영하여 괜찮은 평가를 얻었던 <오 나의 귀신님>, <두 번째 스무살> 모두 금, 토요일 오후 8시 반에 방영되었다. 그리고 금요일 드라마가 끝나면, 어김없이 나영석 표 예능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tvN으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은 8시 반보다 40분 앞당긴(어떤 날에는 8시에 시작하기도 한다) 7시 50분에 드라마를 편성하였다. 즉, 동시간에 방영하는 일일 드라마, 공중파 주말드라마, 뉴스와 정면으로 맞붙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래도 전작들의 성공 덕분에, 방영 전부터 기대작으로 꼽혔던 <응답하라 1988>라고 하나, 이 드라마가 대결해야하는 상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시청률을 자랑하는 강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 <응답하라 1988>은 <응답하라 1994>가 그랬듯이, 주말드라마와 뉴스만 살아남는 줄 알았던 주말 8시~9시 시간대에 당당히 시청률 10% 이상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운다. 그렇다고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하는 시간대에 편성된 기존 드라마, 뉴스의 시청률이 <응답하라 1988>로 인해 떨어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이 프로그램들은 <응답하라 1988> 방영 전과 다름없는 시청률 수치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다만, <응답하라 1988>이 애초 이 시간대에 TV를 보지 않는 새로운 시청자들을 일시적으로 유입한 것이다. 





1971년생인 남자 주인공 쓰레기와 1975년생인 여주인공 성나정과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주를 이루었던 <응답하라 1994>와 달리, <응답하라 1988>의 메인 캐릭터를 형성하는 쌍문동 골목 다섯 아이들은 모두 1971년생이다. 여기에 1965년생인 김정봉(안재홍 분), 1968년생 성보라(류혜영 분), 1972년생 성노을(최성원 분), 그리고 1983년생 진주(김설 분)가 가세하여, 보다 폭넓은 연령대를 구성한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은 이전 시리즈에서는 조연으로 끝났던 젊은 주인공들의 부모들의 역할을 대폭 확장하여,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만이 아닌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응답하라 1988>이 가장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 테마는 젊은 여주인공 성덕선(혜리 분)의 남편 찾기다. 그리고 덕선의 유력 남편 후보로 거론되는 김정환(류준열 분), 최택(박보검 분)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어차피 (덕선) 남편은 류준열(김정환)’이라는 ‘어남류’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고, 그럼에도 이번에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뻔한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택이로 가야한다는 의견이 팽팽 하게 맞서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메가 히트 아이템이자, 로맨스를 좋아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최고의 무기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은 <응답하라 1994>처럼 몇몇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그 외의 다수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묻혀버리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10회 들어서, 덕선을 둘러싼 정환과 택이의 삼각관계가 수면 위에 떠오르며, 이들의 이야기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하나, <응답하라 1988>의 한 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가족이다. 





젊은 주인공들 못지 않게, 그들의 부모로 나오는 성동일, 이일화 김성균, 라미란, 최무성, 김선영, 유재명 등이 모두 골고루 주목받으며, 그들이 선보인 명장면, 명연기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회자되고 있다. 여기서 덕선이의 남편 찾기는 말그대로 거들 뿐이다. 덕선이의 2015년 남편이 누구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이 또한 <응답하라 1988>이 선사하는 재미의 한 요소이지, 드라마를 이끄는 전부는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전 시리즈의 한계를 극복한 <응답하라 1988>가 보여준 분명한 차이점이다. 


‘가족’은 <응답하라 1988>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와 동시간대 방영하는 일일드라마, 주말 드라마 모두가 공통으로 내세우는 소재다. KBS 2TV <부탁해요 엄마>, MBC <엄마>, <내 딸 금사월> 등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요즘 주말 드라마에서 강조되는 캐릭터는 엄마다. 그리고 이 엄마들은 자식들을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극에 탄탄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자식 세대를 대변하는 젊은 배우들도 드라마에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으나, 출중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노련함까지 갖춘 중년 연기자들의 카리스마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중년 연기자들의 열연 덕분에, 이들 드라마들은 평균 20% 안팎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자랑한다. 그런데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 이들 드라마들은 그에 비례하는 높은 화제도를 얻지 못한다. 아예 임성한 드라마처럼 괴기한 장면으로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는 한, 일일,주말드라마들은 더 이상 온라인 상에 화제가 되지도, 젊은 네티즌들에 의해 거론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일일, 주말 드라마는 엄마들이 빠짐없이 챙겨보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MBC <무한도전>이 유재석이 <내 딸 금사월>에 카메오로 출연했을 때, 해당 드라마도 덩달아서 잠깐 주목받은 적 있었지만, 평소 김순옥 표 막장 드라마로 악명높았던 이 드라마가 젊은 시청자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얻었던 것은 딱 유재석이 출연했던 그 때 뿐이다. 





가족 드라마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정작 부모 세대만 시청하는 중년 드라마들이 가득한 금, 토 오후 8시 시간대에,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 후반 인기리에 방영한 <한 지붕 세가족>에서나 나올 법한 정통 가족 이야기를 표방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보통의 가족 드라마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재벌은 기본이요, 엄친아들이 즐비한 여타 가족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달리, <응답하라 1988>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이게하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기존의 방영된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자칫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은 기존 <응답하라> 시리즈의 고정팬은 물론이거니와, 평소 이 시간대  가족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청자들까지 유입시키는 데 성공을 거둔다. 


표면적인 시청률은 10% 중반이지만, 온라인 체감 시청률은 그 이상을 뛰어넘는 <응답하라 1988>의 주요 시청자들은 1980년대 후반을 살았고, 그 시기에 아련한 기억이 남아있는 30~40대들이다. 여기에 그 시기를 살지 않았지만 드라마 자체의 재미와 류준열, 박보검, 고경표, 류혜영, 안재홍, 이동휘 등 젊은 배우들에게 매료된 젊은 시청자들이 가세하여, 웬만한 공중파 드라마들을 훌쩍 뛰어넘는 탄탄한 인기를 보여 준다. 분명 <응답하라 1988>이 중년들만을 위한 시간대에 젊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인 데에는 매력적인 남성 배우들을 앞세운 달달한 로맨스가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답하라 1988>이 이전 <응답하라> 시리즈 외에도 여느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와 확연히 다른 차별점을 구현하고,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흥미를 안겨줄 수 있는 힘은 가족에 있었다. 





가족의 사랑을 담고 있다고 하나, 정작 보는 이들의 피로도만 쌓이게하는 무늬만 가족 드라마가 아닌,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 그 어느 때보다 ‘가족’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고 하나,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된다는 ‘수저 계급론’만 조장하거나, 혹은 부모 세대의 이해 관계만 강조되는 듯한 드라마, 예능의 홍수 속에서 그야말로 쌍팔년도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 21세기를 살아가는 자식 세대들도 공감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보여주는 <응답하라 1988>의 저력이 유독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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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서울올림픽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길이 남을 사건도 있지만,  1988년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해철이었다. 당시 TV 생중계로 MBC <대학가요제>를 지켜보던 시청자 대부분이 마지막 16번째팀으로 등장한 신해철의 ‘무한궤도’를 대상으로 찍었고, 심사를 맡고 있던 조용필은 ‘그대에게’ 전주만 듣고 바로 대상으로 낙점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기 전, 당시 “멤버들 다들 여자친구 있나?”는 김은주 아나운서의 질문에 스무살 신해철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절대 그럴 일이 없죠.”라고 답한다. 아직 노래를 부르기 전 이었지만, 그 때 이미 ‘무한궤도’로 판세가 기울 었을 지도 모른다. 명문대에 다니는 잘생긴 오빠들이 여자친구도 없다(?)니. 게다가 그공부 잘하고 잘생긴 오빠들이 들고나온 노래는 전주 만으로도 앞에 나왔던 음악들을 까마득하게 잊게 할 정도로 끝내주게 좋았으니, 바야흐로 신해철 시대의 서막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대학 축제 응원가로 자동 반사되는 밝고, 명량한 노래였다. 가사는 영락없이 이제 막 사랑에 눈 뜨기 시작한 풋풋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대학가요제 이후 수많은 대학에서 어여쁜 치어리더들의 율동과 맞춰 목청 터져라 청춘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찬미 했던 이 노래. 하지만 2014년 10월 27일 고 신해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그대에게’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예전만큼 티없이 해맑은 소년의 웃음처럼 싱그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난 27일 tvN <응답하라 1988> 7회의 부제는 ‘그대에게’다. ‘그대에게’는 <응답하라 1988> 시작과 함께 울러퍼지는 공식 오프닝곡이기도 하다. 1988년에는 당시 <대학가요제>에서 쌍벽을 이뤘던 <강변가요제>의 대상곡 이상은의 ‘담다디’도 있었고,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던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등 많은 히트곡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신해철의 ‘무한궤도’를 선택한 것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고 신해철을 향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은주 아나운서와 인터뷰에서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했지만,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이 그간 사랑했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목청 터져라 외치는 신해철의 세레나데는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기 충분했다. 가사만 놓고 보면, 그 전 해 1집 앨범만 달랑 남겨 놓고 떠난 고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에 버금가는 가슴 절절한 사랑 노래인데, 이상하게도 ‘그대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응원가로 불러지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같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대에게’의 그대가 과연 사랑하는 연인만을 대상하는 지칭일까 궁금해졌다. 분명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 나누고 싶다는 ‘그대에게’는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간절히 묻어나는 노래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포기하지 않는다.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그대 곁에 있겠다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분명 좋아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노래이지만,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노래로 다가오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고백송은, 매일 시내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청춘들이 목숨걸고 싸우고 있는 이 비상시국에,  허구헌 날 사랑타령만 한다는 당시 가요들을 탐탐지 않게 생각했을 법한 대학생들에게도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오는 노래였다. 


물론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신해철 또래 대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관심 보다도 음악에만 탐닉하는 미소년 신해철은 그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던, 엄밀히 말하면 온실 속 화초에서 곱게 자라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조현문처럼 재벌가 자식도 아니었고,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하였지만, 고교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스무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부모님께 효도할게요”라는 멘트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1974년 봄에 이별한 병아리의 죽음을 어른이 된 이후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일찌감치 삶과 죽음에 눈 뜬 신해철은 자신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치열한 고민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해법을 찾은 듯한 신해철은 음악 속에 파묻혀 살던 유약한 미소년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겁없이 쓴소리를 날리는 독설가가 되어있었다. 





한 때 민주주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1980년대 또래 청춘들이 이제 현실이란 무게에 짓눌러,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고 있을 때, 스무살 어린 나이에 주류문화의 스타로 떠올랐던 신해철은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현실과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음악, 정치, 사회, 문화 등 신해철은 자신이 진짜 목숨걸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타협이 없었다. 신해철이 살아왔던 지난 46년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걸고 싸우는 투사였다. 비록 중간중간 신해철이라는 사람에게 실망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신해철처럼 자신이 남긴 음악, 메시지, 철학과 비교적 일치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드물다. 


그런 신해철도 사랑하는 여인(윤원희)을 만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일침도 서슴지 않게 날리던 시대의 논객은 부인과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 하여 낯부끄러운 닭살 금슬을 과시하고, 자상한 아빠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예전과 비해 많이 달라진 그였지만, 신해철이 가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대(가족)을 위해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그대를 지키기 위한 신해철만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그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귀담아 듣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싸워온 신해철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그대 사랑해…” 


<응답하라 1988> 7회에서 오손도손 모여앉아 <대학가요제>를 시청하던 쌍문동 아이들은 어느순간 약속이라도 했듯이,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쌍문동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어느덧 ‘그대에게’의 마지막에 접어든다. 그러고보니 ‘그대에게’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었다고 한들, 이 노래의 끝까지 귀 기울어서 들은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의도적으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자신의 마지막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스무살의 신해철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그대를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수줍은 고백을 마무리 짓는다. <응답하라 1988>에서 아들 최택(박보검 분)을 위해 갖은 정성을 기울 이지만, 특유의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한번도 아들에게 사랑하지 못했던 아버지 최무성의 애틋한 마음처럼, 신해철의 ‘그대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신해철의 부재와 더불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점점 무너지고 있는 시대. 매회마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쌍문동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라야한다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대에게’만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노래가 또 있을까. 이제는 대학 응원가보다 <응답하라 1988>의 시그니처 송으로 기억될 ‘그대에게’가 오늘따라 더욱 먹먹 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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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너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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