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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우리 손자 베스트로 바라본 노인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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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에는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장선우 감독 조연출을 거쳐, <귀여워>(2008), <창피해>(2010)을 만든 김수현 감독의 <우리 손자 베스트>가 나란히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개봉주 기록한 박스오피스 스코어는 암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글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이고, 저명한 영화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아도 상영관을 잡지 못해 흥행에서 처참히 실패하는 대한민국 영화시장의 악순환을 고발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이미 여러 영화 전문 기자들이 문제로 제기했지만, 영화 배급까지 겸하는 대기업 계열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극장산업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상영구조까지 좌지우지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작은 영화들이 대기업 멀티플렉스가 베푸는 선심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일베’, ‘어버이 연합’ 등 논란되는 소재에 스타성있는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우리 손자 베스트>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보기조차 어려우니까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우리 손자 베스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영국, 한국이라는 각각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이 두 영화만큼 현 시점을 살고 있는 노인을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제 기억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화, 드라마에서 노인을 표상하는 방식은 오랜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현명하게 살아가는 어르신을 보여주거나 젊은이들이 속칭 ‘꼰대’라고 부르는 고집불통 어르신, 아니면 병들어 힘없고 나약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본의 아니게 세계사를 쥐락펴락한 독특한 할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제가 언급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배우로서 성공을 거둔 어르신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의외의 귀여운 매력까지 보여주신 tvN <꽃보다 할배>는 예외로 해두죠. 


그러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우리 손자 베스트>에 등장하는 어르신들은 <꽃보다 할배>에 등장하는 어르신들처럼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습니다. 영국의 쇠락한 도시(<나, 다니엘 블레이크>) 혹은 서울의 탑골공원이나 청계광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들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두 영화에서 등장하는 노인 캐릭터는 정 반대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어르신은 석연치 않게 탈락한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고군분투 한다면, <우리 손자 베스트>의 정수 어르신은 복지 제도의 강화를 요구하는 이들을 종북, 빨갱이라 몰아세우는데 앞장서는 이 시대 진정한 애국노인입니다. 




영화 속 정수 어르신들이 들으시면 진노하시겠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어르신, <우리 손자 베스트>의 정수 어르신은 모두 사회적인 성공에서 한 발 물러난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어르신은 자신의 경제적 궁핍을 인정하고, 질병 수당을 제대로 주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질긴 싸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난하고 자식들에게도 외면당하는 노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손자 베스트>의 정수 어르신은 진보 단체 회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세월호 유족들을 괴롭히는 어버이가 되어 자신이 가진 남성성과 애국심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일평생 종북 좌파 척결에 앞장선 정수 어르신의 유일한 소원은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 죽은 뒤 국립현충원에 묻히는 것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까봐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정부와의 소송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어르신, 국가유공자를 간절히 바랐던 <우리 손자 베스트> 정수 어르신의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인간으로서 최소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목놓아 외쳤던 다니엘 어르신은 수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었지만, 애국보수 정수 어르신이 나라를 위해 행했다는 순수한 마음은 희화화될 뿐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출한 켄 로치 감독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이다”라는 말을 남겨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켄 로치 감독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난을 한 개인의 나태함과 노력 부족으로 몰고가는 세상을 향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가난의 늪에 빠진 다니엘을 통해 가난이 과연 누구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인지 따져 묻고자 합니다. 


하지만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앞세워 18년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한 박정희 집권 기간 동안 “가난은 죄악”, “가난은 노력하지 않은 너의 잘못”이라고 수도없이 세뇌 당해왔던 애국보수 어르신들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시민들을 비하하고, 맞불 집회를 통해 그 세를 과시하고자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외치는 다니엘 어르신보다 여전히 박정희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 좌파로 몰고가는 정수 어르신과 같은 분들을 더 많이 만났습니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러한 애국보수 어르신들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들의 시선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꿋꿋이 ‘박근혜 탄핵 무효’ 집회를 여시는 애국 보수 어르신들의 기원, 그분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서 속시원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경멸의 눈빛으로만 보았던 애국 보수 어르신들 입장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이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 상영관 찾기 정말 어렵지만 기회가 되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함께 꼭 보시길 바랍니다. 두 영화 모두 올해 영화 베스트에 꼽힐 만한 시대의 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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