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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스펜서' 비극의 여인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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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고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시 그녀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을 안겨다주었다. '민중의 왕세자비'라는 칭호처럼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듯하다. 

 

 

존 F.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리 케네디 오나시스의 관점에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전후를 다룬 <재키>의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 <스펜서>는 영국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 스펜서가 1992년 찰스 왕세자와의 공식 별거를 선언하기 전 영국 왕실의 전통인 크리스마스 휴가를 배경으로 그녀가 왕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입지를 완벽히 굳힌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역을 맡았고, 실제 다이애나와의 높은 싱크로율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의 오랜 불화 등으로 힘든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섭식장애, 자살 충동 등을 겪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왕실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이후 다이애나가 직접 폭로한 내용을 제외하곤, 왕실 밖의 사람들이 왕실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 수 없는 법. 때문에 <스펜서>는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던 다이애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하는 왕실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다이애나의 아픔을 집중 조명하되 세부적인 설정들은 제작진들의 상상에 의한 픽션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왕족 못지 않게 명망있는 귀족집안 영애였던 다이애나와 결혼할 당시에도 버젓이 카밀라 파커불스와 불륜 관계였던 찰스 왕세자와 왕실은 다이애나가 그저 그들의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인형이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 결혼 당시 혼인서약문에 있던 '순종'의 단어를 빼고 읽을 정도로 주체적인 면모가 강한 여성이었고, 그런 다이애나를 왕실은 더욱 강하게 옥죄이고자 했다. 

 

다른 왕족들과 다르게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차로  크리스마스 휴가지인 샌드링엄 별장에 뒤늦게 도착한 다이애나는 등장부터 도발적이다. 이미 왕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밉보인지 오래인 다이애나는 왕비가 될 자신도 없고 더 이상 왕실에 버틸 힘도 없어 보인다. 다행히 그녀 곁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식 윌리엄, 해리가 든든히 지켜주고 있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린 다이애나는 끊임없이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있고 그녀의 삶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이 매사 위태로워 보인다. 

 

 

여기까지 보면 <스펜서>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비극적인 삶을 다뤘던 여타 다른 서사물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허나 <스펜서>는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고자 하는 왕실에 의해 날로 피폐해져가는 스펜서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다이애나가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의외의 쾌감을 만들어간다. 

 

다이애나 스펜서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이애나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세기의 아이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의 상징인 왕실 별장을 빠져나와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하는 다이애나로 마무리되는 <스펜서>는 자칫 역사 왜곡의 우려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허나 <스펜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아니요, 엄연히 다이애나의 실제 삶을 토대로 그 위에 새로운 해석과 상상력을 더한 픽션극일뿐이다. 

 

 

 

"왕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로 결심한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포부처럼 <스펜서>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비운의 여인이 아닌, 본인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용감한 여성의 질주를 보여준다. 생전 다이애나 스펜서가 끝까지 달리지 못했던 몫까지 극 중 다이애나를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힘차게 달려주는 듯한 영화는 어쩌면 다이애나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둘러싼 억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하는 여성들을 위한 뜨거운 위로와 응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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