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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터치 절망 속에 끌어올린 생명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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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종영했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반듯한 국민남편 유준상이 알코올 중독자로 변신했다는 소식에 잠시 화제가 되었던 영화 <터치>. 하지만 <터치>는 유준상의 알코올 중독 연기가 다가 아니다. 그 속을 들어다보면 우리가 잠시 잊고 싶어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되는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터치>의 중심을 이끌어 나가는 동식(유준상 분)은 그야말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 위기의 가족이다. 한 때 국가대표 선수였지만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중학교 사격 코치 직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동식의 무능함은 아내 수원(김지영 분)의 억척스러움으로 이어진다. 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는 수원은 병원 몰래 돈을 받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를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보내는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엄연히 불법이고,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알코올 중독 남편 대신 어린 딸 주미를 키우려면 그 일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동식은 다니고 있던 중학교 사격 코치 직에서도 해고될 위기고, 어떻게든 코치직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이사장 앞에서 잠시 끊었던 술까지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부적절한 유혹에도 응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사격 부 학생을 자신의 차로 치이고 말았고, 동식은 그 길로 줄행랑을 친다. 그러나 동식은 곧 음주 뺑소니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수원은 남편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돌보고 있던 환자의 성적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수원은 그 날 이후 병원일을 그만두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린 딸 주미가 중학교 남학생으로부터 가슴과 엉덩이에 낙서 흔적을 남긴 성추행을 당하게 되고, 울분에 찬 수원은 자신의 딸을 추행한 남학생을 찾으러 가지만, 그곳에서는 병들어 죽어가는 학생의 어머니만 누워있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수원을 구원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원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었던 여자다. 사회복지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었던 여자는 분명히 국가로부터 일정 부분 사회복지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병원은 그녀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퇴원 시킨 지 오래다. 사회복지 공무원을 찾아가봤지만  남편도 없이 중학생 아들과 함께 병든 몸으로 살아가야하는 여자에게 형식적인 재정 지원 외엔 찾아보거나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애초 수원의 직업은 가족을 대신하여 아픈 환자를 대신 돌보는 임무였으나, 오히려 수원은 요양 센터와 환자 가족들과 결탁한 불법 거래에 순응해야했다. 코치직을 유지하기 위해 이사장의 추파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하는 동식도 마찬가지다. 돈 앞에서는 국가대표 출신의 자존심도,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타이틀도 무참히 버려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아가야한다. 점점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이들 부부는 어떻게든 최악만큼은 면해보고자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사회가 놓은 덫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던 수원과 동식이 자기보다 더 약한 존재를 지키려고 나서는 순간,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게 되고, 진정한 구원을 받는다. 술에 취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차에 치여 놓고도 도망간 동식이 보호해주는 존재는 뿔이 잘려나간 사슴이요, 간병인으로서 환자를 돈벌이에 이용한 죄책감을 안고 있는 수원은 아픈 여자를 진심으로 간병하며 환자들을 끝까지 돌봐주지 못한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그렇게 자신의 눈앞에 놓인 고통조차 스스로 감내하기 어려워보이던 수원은 자기보다 처지가 더 딱한 여자를 통해 간병인으로서 사명감을 회복한다. 뺑소니 사고 이후 도무지 미래가 없을 것 같아 보이던 동식도 다시 중학교 사격 코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아무 탈 없이 위기가 잘 넘어갈 것 같았던 수원과 동식이지만, 그럼에도 이들 부부가 과거에 지었던 죄의식은 쉽게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 첫 부분에 자신이 요양원에 불법으로 넣었던 환자의 장례 미사 참여 당시 뿔잘린 사슴을 목격한 수원을 시작으로, 유독 이 영화에는 사슴이 등장이 잦다. <터치> 민병훈 감독이 주인공들의 복잡한 내면을 상징하는 판타지 성 수단으로 사슴을 앞세운 것에 대해, 부부의 매개체로서 희망도 상징한다는 점을 꼽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슴은 절대적인 신의 존재, 혹은 두려움의 존재일 수도 있고, 주인공 자신을 일깨워주는 환영일 수도 있다(민병훈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실제 <터치>에서 사슴은 절망의 늪에 빠진 부부가 한 줄기의 희망을 만났을 때 부부의 눈 앞에 나타난다. 부부가 위기일 때마다 희망을 일깨워주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슴은 부부에게 기회를 주는 절대자의 위치에 서있다. 그러나 술에 취해 과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차에 치고 도망간 죄책감에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저지른 동식의 충격적 행위 속 사슴은 동식의 내면을 괴롭히는 죄의식의 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슴을 이용한 연이은 상징성 강조는 벼랑 끝에 몰리다가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를 보살핌으로서 구원받는 영화의 주제를 모호하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 <터치>는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시대,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을 현실감 있고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완성도 있는 영화다. 


벼랑 끝으로 몰려버린 동식과 수원은 이미 벼랑으로 떨어진 이들을 구함으로서 재기의 희망을 다시 품게 된다. 동식과 수원이 베푼 온정이 받는 이에게는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큰 은총을 이끌어낸다. 누군가 나로 인해 다시 꺼져가는 삶의 등불을 지필 수 있고, 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다면 그것만큼 나의 삶을 환하게 비춰주는 기적도 없을 것이다. 절망 속에 타오른 사랑과 나눔이 이끌어낸 작고도 큰 희망. 100분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보는 이를 숨막하게 몰아가면서도 가슴시리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한 줄 평: 누군가를 향한 따스한 손길이 작고도 큰 기적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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