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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초행(2017)’. 7년차 커플의 리얼 연애담을 돋보이게 한 즉흥 연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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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만 7년 한 커플이 있다. 남녀 둘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기 때문에 주위, 특히 부모님들 사이에서 결혼 하라고 성화다. 하지만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대학원에 들어가려는  남자와 종편 방송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자는 서로의 경제적 불안 때문에 결혼할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한다. 그러던 찰나, 2주 넘게 생리를 하지 않아 고민하던 여자는 임신테스트기를 사게되고 여러 복잡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서른을 넘긴, 아직 미혼이거나 이제 막 결혼한 사람들이라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에피소드다. 김대환 감독의 <초행>(2017)은 30대 초반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흔히 겪는 일상을 소재로 한 영화다. 얼마 전 결혼한 아내와의 연애 시절의 경험담을 녹여 만든 영화는 실제 감독이 겪었던 상황들을 이야기로 풀어 냈기에 그만큼 탄탄한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함께 사는 수현(조현철 분)과 지영(김새벽 분)의 사이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수현과 지영의 관계는 누군가의 개입, 방해만 없으면 아주 평온해 보인다. 슬프게도 이 두 사람의 평정심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부모다. 경제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지영, 수현 모두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지영의 어머니(조경숙 분)는 지영과 수현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부모 입장에서 별로 자랑거리가 없다는 딸의 현실을 거론하며 지영에게 상처를 준다.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지영과 함께 고향 삼척으로 향하는 수현은 아예 아버지(문창길 분)와 말도 섞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현의 어머니(길해연 분)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 수현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한 채 수현과 지영의 결혼을 종용하다가 오히려 아내에 의해 제재를 당한다. 


결혼을 고민하는 수현과 지영이의 앞에 놓인 장애물은 가족, 부모다. 눈으로 봐도 확연히 드러나는 각 집안의 경제력 차이도 이 두 사람의 결혼이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도 조그마한 희망이 있다면, 지영의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해도 지영과 수현을 묵묵히 지지하고 위로하는 지영의 아버지(기주봉 분)이 있고, 아들과의 결혼을 독촉하는 대신 지영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수현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다. 


수현과 지영을 둘러싼 현실이 마냥 좋지는 않지만, <초행>은 섣불리 절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쉽게 낙관론을 꺼내 들지 않는다. <초행>을 감도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모름’ 그 자체다. 극중 수현과 지영 모두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영화는 갈팡질팡 하는 두 사람을 고스란히 따라가고자 한다. 




결혼을 앞둔 30대 초반 커플의 현실을 실감나게 그려낸 플롯도 인상적이지만, <초행>은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보다 작업 방식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영화다. <새출발>(2014), <춘천, 춘천>(2016)을 연출한 장우진 감독과 의기투합하여 ‘봄내필름’이라는 제작사를 만든 김대환 감독은 김 감독과 장 감독의 고향인 강원도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장우진 감독의 <춘천, 춘천>에서는 김대환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았다면, 이번 <초행>에서는 장우진 감독이 프로듀서가 되어서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김대환 감독이 미리 쓴 시나리오가 있긴 하지만 배우들에게 장면에 대한 개략적인 상황만 설명하고, 촬영 당시 현장 상황과 배우들의 감정에 맞춰 즉흥 연출, 연기를 진행한 요소 또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즉흥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김대환 감독은 이미 <춘천, 춘천>에서 즉흥 연출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장우진 감독의 도움과 배우들을 믿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여러 인터뷰 및 관객과의 대화(GV)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현장성, 기동성을 중시하는 즉흥 연출을 추구한 탓에 현장 스태프는 최소한으로 꾸려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현장 상황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들의 감정변화를 고려한 즉흥 연출 덕분에 <초행>은 지난 5월 종영한 MBC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리얼 가상 연애를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예능보다 한층 더 성숙하고 실감나는 연애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운영하는 제작, 투자프로그램인 ‘전주시네마프로젝트 2017’로 첫 선을 보인 <초행>은 제70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감독 최초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얼마전 남미 최대 영화제로 알려진 제32회 마르텔플라타 국제영화제에서는 각본상을 받았다. 현재 김대환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가제)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난 8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된 <초행> GV에는 봉준호 감독이 참석해 <초행>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국내외 영화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스토리텔러 김대환 감독의 <초행>은 12월 7일 개봉 이후, 절찬 상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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