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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클레어의 카메라’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천천히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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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제작사에서 실장으로 근무하던 만희(김민희 분)는 칸영화제 출장 도중 회사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에게 영문도 모른채 해고를 당한다. 자신을 해고하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만희에게 양혜는 만희가 부정직 하다는 자신의 판단 하에 결정 했다고 통보한다. 짐작건대, 양혜는 자신이 흠모하는 소완수 감독과 술김에 하룻밤을 보낸 만희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녀를 해고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튼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에 멘붕이 온 만희 앞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다니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이 나타난다. 




지난 25일 개봉한 홍상수의 20번째 장편영화 <클레어의 카메라>(2016)은 홍상수 영화 중 이례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투톱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문성근에 이어 홍상수의 새로운 닮은꼴 자아로 급부상 중인 정진영이 비중있게 등장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만희와 클레어 두 여성을 중심으로 장면이 진행된다. 


양혜가 만희에게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한 날, 만희는 양혜에게 이별 기념 사진을 찍자고 제안한다. 5년동안 함께 일했는데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양혜는 그런 만희가 당황스럽게 느껴지지만 만희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 사실 자신을 해고시킨 사람과 바로 사진을 찍는 만희보다 더 황당한 존재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만희를 해고한 양혜다. 




만희를 해고하고 양혜와 바닷가에서 함께 유유자적 시간을 보낸 소 감독은 한 카페에서 우연히 친구따라 영화제에 놀러온 클레어를 알게된다. 아무래도 소 감독은 프랑스에 대한 동경심이 조금 있는 것 같다. 클레어와 함께 도서관을 가게 된 소 감독은 프랑스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어로 시를 낭송하는 클레어에게 아름다운 시 라면서 자신에게 프랑스어 발음을 가르쳐줄 것을 부탁한다.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클레어는 사진을 찍으며 시를 쓰는 예술가 이기도 하다. 예술가인 클레어는 예술가처럼 보이는 소 감독에게 말을 걸고, 역시나 예술가처럼 느껴지는 만희에게 다가간다. 영화를 파는 일을 하는 만희는 자신은 예술가는 아니고 예술가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만, 교사이면서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클레어를 보고 자신 또한 유치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클레어가 영화에 등장 하기 이전, 소 감독을 만나러 왔다가 만희와 마주친 한 감독(이완민 분)은 이렇게 말한다. “사는 모습이 솔직해야 영화도 솔직하죠.” 겉으로 보면 자기 감정에 충실한 양혜와 소 감독은 매우 솔직한 사람으로 보인다. 자기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내 판단을 존중하고 이해해달라는 그들은 뻔뻔해 보이면서 어떻게 보면 순수하다. 만희를 해고하면서 양혜는 만희가 가진 순수함이 정직함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만희를 정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양혜 또한 자신이 만희를 해고 하려는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앞서, 양혜는 소 감독에게 만희를 두고 영어는 못하지만 일은 꼼꼼히 잘하는 직원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클레어와 막힘없이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만희와 달리, 정작 양혜는 클레어에게 영어 발음이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 감독은 홍상수 영화에 늘 등장 하는 위선적이고 지질한 남자 캐릭터 그대로다. 술 때문에 어쩌다가 만희와 하룻밤을 보낸 소감독은 그 일 때문에 만희를 해고 시키려는 양혜의 판단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다가 다시 술을 마시면서 만희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이다가 양혜에게 사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일로서만 만나자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영화제 파티 도중 만희를 다시 만나게된 소 감독은 만희의 야한 옷차림을 질타 하며 그녀에게 상처를 안겨준다. 


다른 이에겐 정직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정직하지 못한 모습만 보이는 양혜와 소 감독에게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클레어가 나타난다. 그들은 클레어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이내 동의하는 척 반응을 보인다. 카메라는 순간을 포착하여 촬영하는 기기다. 클레어가 가지고 다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처럼 사진을 찍자마자 바로 출력된다고 해도 그 사진에 찍힌 모습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허나 양혜와 소 감독은 자신들 또한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반면, 만희는 자신이 억울하게 해고당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면서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런 만희에게 클레어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천천히 바라봐야 한다.”는 조언을 건넨다. 클레어는 자신이 가진 카메라로 부정직과 위선으로 가득찬 존재들을 찍거나 몇 마디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건넬 뿐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 홍상수 작품 중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이후 조금씩 달라 지고 있는 홍상수의 세계관이 집약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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