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백홍석에게 끝내 오지 않은 기적 다행인 이유

<추적자> 마지막회. 백홍석(손현주 분)에게 기적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백홍석은 법정에서 살인을 일으키고, 도주를 하였다는 죄명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반면 백홍석 딸 수정이의 죽음을 사주한 강동윤(김상중 분)은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습니다. 직접 살인과 사법제도 농락이란 더 큰 죄가 부가되긴 했지만, 사법제도로는 쉽게 구제받을 수 없는 힘없는 서민에게 불리한 판결이 답답해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백홍석은 담당 변호사 최정우(류승수 분)까지 포기한 상태입니다. 백홍석 재판 전날 심신미약, 정상참작 등을 거론하며 어떻게든 백홍석이 무죄 혹은 가벼운 형량을 받게 하려던 최정우는 당일 백홍석의 변호사가 아닌 고 백수정의 변호사로 다시 신발끈을 동여 매기 시작합니다. 백홍석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무죄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딸 수정이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니까요. 

백홍석 구하기에서 백수정 구하기로 방향을 바꾼 최정우의 전략은 백홍석 징역 15년 외에는 제법 큰 수확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91.4%의 투표율이 나오기 직전 어림도 없었던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총수 딸이 끝내 백수정 교통사고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되어있으니까요. 

살인미수 뺑소니, 살해사건, 한 여중생의 죽음, 딸을 이은 어머니의 자살, 법정에서 살해당한 인기 연예인 그리고 역대 최고 소용돌이를 일으킨 대통령 선거. 모두 한오그룹 큰 딸이자 유력 대선후보 강동윤의 아내 서지수(김성령 분)의 범행이 세상에 알려지길 막기 위한 누군가의 계략에서 시작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처구니 없는 트릭이었지만, 당시 엄청난 힘을 가진 유력 대권 후보 아내이기 이전에 이 나라 삼부 권력자들도 머리를 조아린다는 숨겨진 황제 서 회장(박근형 분)의 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강동윤은 살인 교사 혐의로 자택에서 긴급 체포되기 직전에도 아내 서지수의 범행은 끝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서 회장과 약속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달리 뺑소니 혐의로 쉽게 구속될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91.4%라는 경이로운 투표율은 대다수 99%사람들에게 엄격히 적용되는 법 위에서 군림하는 공주를 뺑소니 살인미수 혐의자로 체포하는 기적을 일구어냅니다. 물론 한오 그룹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는 공주님과 황제의 부마는 국민들이 그들을 잊을 때쯤 되면 곧 특별 사면 받아 풀러나시겠지만, 쉽지 않았던 서지수의 구속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울분에 쌓아있던 tv 바깥 국민들을 고무시키는데 충분합니다. 

강동윤 부부가 법적 처벌을 받기 까지에는 분명 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전직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자, 도주자를 자청하다가 끝내 징역 15년을 선고받으면서까지 자신을 내던진 백홍석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허나 백홍석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인공들처럼 혼자의 힘으로 악당을 물리칠 수 있는 영웅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자마자 단순 분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가진 가장 숭고하고 막강한 힘으로서 서 회장과 강동윤 같은 권력자에게 정의 구현의 열망을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쾌거입니다. 배트맨, 슈퍼맨과 달리 백홍석과 그의 주변 사람의 고군분투만으로는 서회장, 강동윤 같은 골리앗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요즘 골리앗들은 다윗 몇 명의 조그마한 짱돌로 허술하게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수백명, 수천명, 수만명 모여 함께 골리앗을 향해 짱돌을 던진다면 다윗들을 농락하던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골리앗이 바로 몰락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골리앗을 일차적으로 넘어뜨리긴 했지만, 3천년 전과는 다르게 제법 맷집을 가지게된 골리앗은 다시 일어나 자신에게 직접 짱돌을 던졌던 다윗을 응징하고, 또다시 자신이 가진 막강한 힘과 돈으로 수많은 다윗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입니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지만 이미 다윗들에게 의해 가장 소중했던 두 팔과 다리가 잘리고 제법 상처도 많이 받은 골리앗은 영 예전같이 마냥 두렵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대통령을 평민들의 호민관으로,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자신의 머슴인냥 부려먹으나 이제는 그의 곁을 지키던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거대한 왕궁에 홀로 남은 원로원 회장의 몰골은 초라하다 못해 쓸쓸한 적막만을 남기게 됩니다. 

반면 골리앗에게 가족을 잃고 징역 15년까지 선고받은 이 시대의 추적자 백홍석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의 곁에는 다시는 고 백수정같은 억울한 사법제도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뜻있는 시민들이 함께 하고 있으며,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한 때는 백홍석이 무죄로 풀려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없는 자에게 가혹하기만 이 나라 사법제도에서 구제받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던 백홍석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가긴 했지만, 어쩌면 백홍석이 빨리 풀려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왜 백홍석이 법정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도망자가 된 이유를 빨리 잊고 싶었던 '비겁함'이 더 컸던게 아니었을까요. <추적자> 속 국민들이 아니라, 실제 91.4% 투표율의 기적을 이끌어내지 못한 현실의 국민들이 말입니다. 

<추적자>도 어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처럼 쉽게 갈 수도 있었습니다. 막강한 초능력으로 법과 질서 위에서 군림하는 악당을 통쾌하게 부숴버리는 영웅담. 암울한 현실일 수록 바로 악마를 짓밟아 버리는 히어로들에게 열광하고, 잠시나마 세상에 갖고 있던 울분을 잊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백홍석이 무죄로 풀려나고 그를 괴롭히던 나쁜 악마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다행히 <추적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서 회장과 강동윤 부부의 처참한 몰락을 보여줬지만 끝내 백홍석에게 무죄를 허하지 않았습니다. 백홍석에게 형량이 선고되자마자, 죽은 딸이 환영이 홍석 앞에 나타나 "아빤 무죄야"를 외쳤지만 현실에서 백홍석은 징역 15년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단순 백홍석의 무죄를 통해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싸그리 잊어버리는 비겁함을 갖게 하지 않아서요. 지금 이 순간에도 백홍석과 같은 억울하게 사법제도에 의해 죄인이 되고야마는 현실에 어떻게 백홍석에게만 '무죄'를 선고할 수 있겠습니다. 

딸의 사적 복수를 위해서 법정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도망을 친 백홍석이 저지른 범죄는 쉽게 사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2의 백홍석같은 억울한 이가 나와서는 안됩니다. 결국 백홍석의 무죄는 오롯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몫입니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슈퍼맨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영웅은 올바른 자각과 시민의식에서 비롯된 '투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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