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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베를린. 분단의 현실과 멜로가 만든 독특한 첩보물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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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이 그 많고 많은 세계의 유명 도시 중에 독일의 '베를린'을 택한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과 비슷한 처지로 묶여있었던 역사가 한몫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통일이 되어 자본국가 독일 통합 수도로 탈바꿈 한지 오래였지만, 23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서방의 서독과 사회주의 동독이 함께 공존하던 미묘한 공간이었다. 이념과 경계가 사라지고 조직에 밀려난 개인이 두드러진 영화 <베를린>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승리 하에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베를린과 참 많이 닮았다. 


대한민국 국정원과 북한의 비밀 감찰요원이 잠시 대립하긴 하지만, <베를린>은 <쉬리>처럼 남과 북이 각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서로에게 비장하게 총을 겨누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치밀하게 훈련받은 국정원 최전방 요원 다수가 북한의 비밀 병기 하나 제압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정원의 무능을 질타하는 것도 아니요, 이 슬픈 분단 현실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고,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뭉쳐야한다는 비장한 민족애를 고취시키기위해 제작된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정원 요원으로 베를린에 파견 근무 중인  정진수(한석규 분)은 나라를 위해 이 한몸 희생한다는 것보다, 그냥 빨갱이 잡는 본인의 임무 자체에 충실한 요원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리고 북한 비밀 감찰요원 표종성(하정우 분)은 베를린 공관 접수를 노린 동명수(류승범 분)의 악랄한 음모로 곧 조국에게서 버러질 운명이다. 또한 베를린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 분)과 표종성 감시를 위해 베를린으로 급파된 동명수의 목적은 새로운 지도자 동지를 위한 충성심 발휘가 아닌, 순전히 아버지와 자신의 이익이 앞선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국가가 규정한 적과 싸우던 첩보원들이 조직 상부의 이해타산에 의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설정은, 첩보물의 새 역사를 창조한 <본 시리즈>에서부터 유래된 단골 메뉴다. 과거 미국, 영국 첩보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에서는, 그 당시 서방의 적 소련 연방의 적들과 맞서 싸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국가 간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강력한 적으로 규정된 아랍 세력마저 시들해진 이후, 할리우드 첩보물의 선택은 국가 혹은 상부 조직에 의해 버려진 비밀병기들의 반격이다.





엄밀히 말하면 조직을 비합법적으로 장악하려는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버려진 개인의 운명을 앞세운 <베를린>의 기본 설정은 그닥 새로울 것이 없는 구조다. 오죽하면 <베를린>을 한국의 '제임스 본'이라고 명명까지할까. 그럼에도 <베를린>이 기존의 할리우드 첩보물과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60년 넘게 전세계 유일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살린 긴장감있는 스토리 전개, 한국 영화 특유의 애틋한 가족애와,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베를린>의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멜로와는 전혀 담을 쌓은 사람으로 보인다.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도 결혼을 일찍하여 큰 애가 벌써 열여섯이라는 로맨틱한 사생활 이야기와는 별개로, 류승완이 구축한 영화 세계는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사내들의 거친 액션 활극이었다. 


<베를린>에서도 건장하면서도 날렵한 남성들이 벌이는 류승완, 정두홍 특유의 액션씬과 표종성과 정진수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선보인 추격씬은 가히 할리우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다. 그런데 여기에 <베를린>에서는 숨막히는 액션 서스펜스 외에도, 동명수에 의해 반역자로 몰린 아내 련정희(전지현 분)을 지키고자 하는 남자의 투박하면서도 진심어린 멜로가 살포시 곁들어진다.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드는 조직

과 맞섰다면, <베를린>의 표종성은 반역자로 몰린 아내를 지키기 위해 사지로 뛰어 든다. 이미 국가를 초월해, 생존을 두고 대립각을 펼치는 표종성과 동명수의 관계는 국가의 틀을 벗어난 철저한 개인과 개인의 투쟁일 뿐이다. 



지금도 한반도 내 휴전선을 기준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맞서 있는 현실은 첩보물, 전쟁영화를 제작하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소재다.  그러나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의 대립을 고조화시키는 대신, 남한과 북한도 아닌, 적과 동지도 아닌 철저히 인간 대 인간의 구도로 그토록 목숨바쳐 충성했던 북조선에 버림받을 위기의 표종성과 그와 손을 잡는 정진수를 바라본다. 





자신과 국가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하는 표종성의 덤덤하면서도 묵직한 헌신과 희생이 오직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첩보물의 신호탄을 알린 셈이다. 아무쪼록 <베를린>의 속편 <블라디보스톡(?)>이 기대되는 바이다. 


한 줄 평: 분단 현실 속 조직에 버림받은 이들이 펼치는 가슴을 적시는 멜로.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첩보물의 신호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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