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전망대

참 좋은 시절. 필요악이 되어버린 하영춘의 불행. 답답하게 다가오는 이유

반응형

지난 13일 방영한 KBS 주말 드라마 <참 좋은 시절> 42회에서 지명 수배 중인 사기 전과7범 한사장(서현철 분)에게 사기 결혼 당한 하영춘(최화정 분)의 딱한 처지는 이미 예정된 운명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때 자기가 데리고 살았던 영춘을 집에서 내쫓고 장소심(윤여정 분)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강태섭(김영철 분)에 의해 한사장을 소개받았던 영춘이 조금씩 한사장에게 마음을 열 때 쯤. 경주지청 검사인 강태섭, 장소심의 아들 강동석(이서진 분)은 한사장 얼굴이 떡하니 박힌 지명수배 전단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 워낙 바쁜 탓인지 자기 아버지 후처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던 동석은 매일 한사장이 영춘을 꼬드기려 자기네집에 들락나락 거리는데도 한사장이 자신이 애타게 찾고 있는 지명수배자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굳이 동석이 '직업 본능'을 발휘하지 않아도, 영춘의 사기 결혼을 막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동석의 부인 차해원(김희선 분)은 한사장이 영춘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습을 수 차례나 목격했다. 당연히 해원은 영춘의 결혼을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의 직언은 철저히 무시된 채, 하영춘이 힘겹게 모았을 법한 무려 '5억원'의 돈이 결국 한사장의 통장에 고스란히 넘어간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 어처구니 없는 비극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엄연히 말하면,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춘이 큰 일을 당해야 그제서야 풀어갈 이야기가 생기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겹사돈은 물론, 본처가 후처와 한 집에서 사이좋게 살고 심지어 본처가 후처를 자기 친딸로 생각하며 시집까지 보낸다는 다소 상식 이상의 전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참 좋은 시절>은 요즘 주말 드라마의 기본이라는 '막장'과는 영 거리가 멀어보인다. <참 좋은 시절> 또한 마냥 평범한 가족 관계를 보여주진 않지만, 그럼에도 <참 좋은 시절>이 막장 성격을 덜 띄는 이유에는 지독하게 착한 캐릭터들 덕분일 것이다. 





70년 가까이 인내하고 헌신하며 살아온 장소심을 필두로, <참 좋은 시절>에는 다 착한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장소심과 함께 한 방에서 지내는 하영춘이라는 인물이 참으로 재미있다. 동희를 낳자마자 장소심 집 앞에 버렸지만, 동희가 너무 그리워 아예 장소심 집에 눌러앉은 하영춘은 드라마 초반만해도 적당히 뻔뻔하고 넉살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하영춘이 동희의 생모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오랜 세월 집 밖으로 나돌던 강태섭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그래도 착하기만 한 강씨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대찬 성격을 가진 줄 알았던 하영춘이 180도로 달라진다. 자신과 함께 집을 나가겠다는 아들 동희의 결심을 막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한사장과의 결혼을 강행하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는 비련의 캐릭터로 말이다. 





가끔 <참 좋은 시절>을 보다보면, 2014년 드라마가 아닌 70,80년대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든다. 젊은 시절 강태섭에게 속아 적지않은 돈을 날리고 설상가상 동희까지 임신한 영춘은 고민 끝에 동희를 강태섭 본가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들을 동희를 버린 죄책감이 너무 큰 탓인지, 오랜 세월 동희의 주위를 맴돌았던 영춘은 5억이라는 돈이 있음에도 불구, 동희는 물론 강씨 사람들의 모진 구박을 감수하고 장소심의 집에 들어가 십수년을 용케 버틴다. 그러나 끝까지 뻔뻔하지 못했던 영춘은 아들의 행복을 위해 조용히 사라지려다가 결국 비극을 맞는다. 


기존의 첩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불쌍한 후처 하영춘의 이야기는 본처와 후처가 오손도손 산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완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에서 하영춘은 남들보다도 상처받고, 눈물을 흘린다. 마치 현재 <참 좋은 시절>의 모든 불행을 하영춘 혼자 감당한 듯 하다. 








그래도 강동석과 차해원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심지어 차해원의 집안을 몰락시키고, 자신을 잡아들이려는 강동석을 위협하는 절대악 오치수(고인범 분)도 있었다. 그런데 오치수도 사라지고, 학수고대하던 강동석과 차해원이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은 지금은 드라마를 이루던 큰 갈등 요소가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물론 겹사돈인 해주(진경 분)과 해원의 신경전, 이제와서 가장 노릇한답시고 큰소리만 뻥뻥 치지만, 이래저래 분란만 일으키는 강태섭이 종종 등장하지만, 오랜 세월 자극적인 설정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는 참으로 밍밍하게 다가올 뿐이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동석과 해원이 결혼을 하고, 더 이상 크게 할 이야기 없는 <참 좋은 시절>에서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불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영춘의 사연은 어쩌면 막바지로 갈수록 침체되기만 하는 드라마를 살릴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영춘의 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악당 한사장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한사장이 사기꾼인지는 몰랐다고 하나, 영춘을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한사장을 소개시켜준 강태섭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영춘의 불행으로 오히려 장소심의 가족들은 더욱 똘똘 뭉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원 혹은 동석이 하영춘의 극단적인 결심을 진작에 말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기어코 영춘이 사기 결혼을 당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 대부분이 답답할 정도로 착한 캐릭터가 그와 정반대인 악당에게 당해야 비로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용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무려 수 억원의 돈을 사기꾼에게 갖다바친 하영춘의 행동은 동정이 아닌 답답함과 피로도만 유발한다. 너무 착해서 답답함만 앞서는 사람들. 마치 <참 좋은 시절>의 현상황을 보는 것 같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