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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베테랑. 답답한 가슴 대신 뚫어주는 시원한 청량제 뒤에 숨겨진 현실의 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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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개인(설령 직업이 광역수사대 형사라고 할지라도)이 엄청난 힘을 앞세워 약자를 괴롭히는 이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온 영원한 스테디셀러이다. 





현실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숨죽이고 살아야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나쁜 놈들 빰 때려주는 것만큼 더 통쾌하고 시원한 청량제는 없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테랑>은 아예 작정하고 시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기 위해 만든 오락 액션 영화다. 


이미 <부당거래>(2011)을 통해 부패한 권력을 신랄하게 풍자한 전력이 있는 류승완 감독에게 검찰, 경찰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주무를 수 있는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 분)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어쩌면 뉴스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들을 많이 본 듯한 기시감 때문에 조태오라는 희대의 망나니에 더 격한 몰입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조태오는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도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 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다. 설령 그가 검찰, 경찰의 수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보여주기 식으로 가벼운 형량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민주사회라고 하지만, 조태오같은 사람에게는 유독 특별한 법이 적용되는 것 같다. <베테랑>에서도 조태오는 건드려서는 안 될 엄청난 분이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그들만의 룰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베테랑>에는 감히 조태오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서도철(황정민 분)이 존재한다. 조태오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가의 골칫덩어리라면, 서도철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특유의 다혈질 때문에 상관들의 머리를 꽤나 아프게 하는 자타공인 트러블메이커이다. 애초 조태오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본 서도철은 조태오가 배기사(정웅인 분)와 관련된 의문의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고,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물론 서도철의 수사는 순탄치 않았다. 서도철을 막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작동하고, 그에 따라 서도철은 물론 그가 속한 팀의 동료, 가족까지도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서도철은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달린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서도철이 형사라는 직업 의식이 뚜렷하거나 사회개혁에 관심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때리기 위해서 경찰이 되었다는 평을 줄곧 받는 서도철은 승진에 목을 메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 중 하나였다. 


그런 서도철이 자신을 줄곧 도와주던 배기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조태오를 잡기 위해 그에 뒤따르는 부당한 위협, 징계 등을 모두 감수하고 총력을 다한다. 비상식적인 상황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직접 실행으로 옮기는 서도철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당연시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나마 깨어있는 상식적인 사람이요, 소시민들의 숨통을 잠시나마 틔워주는 현대판 영웅이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오락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류승완 감독의 바람답게 <베테랑>은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한국판 블록버스터이다. 하지만 웃음과 액션 뒤에 숨겨진 상황들 또한 가볍게 흘러가지 않는다. 류승완 감독의 전작 <부당거래>보다 풍자의 강도는 약해지고, 오락성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한들, <베테랑>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막대한 자본을 가진 갑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하는 을의 설움이 만연한 2015 대한민국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앞장서는 서도철의 활약과 이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절대 악당 조태오의 대결을 통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지만 그 감흥도 극장 문을 나서기 전까지만이다. <베테랑>의 서도철이 사는 세상이 아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조태오는 여전히 건드려서는 안될 인물이요, 억울한 배기사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또한 영화 <베테랑>에서만 가능한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영화를 보는 순간만이라도 그간 쌓였던 울분을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는 <베테랑>은 분명 류승완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21세기형 을들의 판타지이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곱씹어 보는 순간, <베테랑>은 재미있고 신나는 판타지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서도철이 없는 우리들의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답답하고 갈증나는 이 여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씁쓸한 뒷맛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류승완표 청량제를 적극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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