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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007 스펙터. 제임스 본드의 클래식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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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카이폴>(2012)에 이어 <007 스펙터>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과연 MI6가 계속 존재해야하는지, 엄연히 말하면 007 시리즈의 지속 여부다. 





<007 카지노 로얄>(2006)에서부터  <007 스펙터>까지, 다니엘 크레이그는 바야흐로 21세기 관객이 요구하는 제임스 본드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최고의 007이었다. 처음 그가 제임스 본드로 등장했을 때는, 기존의 제임스 본드가 가진 이미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007 시리즈 팬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다니엘 크레이그 없는 007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니엘 크레이그는 21세기형 제임스 본드 그 자체다. 아직 <007 스펙터>가 영국 및 북미에서 개봉중임에도 불구,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차기작을 맡을 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정도다. 


벌써부터 다니엘 크레이그가 없는 007이 걱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첩보물 시리즈가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확신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분명 007 시리즈는 시리즈 영화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첩보물 전성시대를 스스로 연 만큼,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시리즈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아무리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한들, 그 전통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야한다는 문제는 그와 별개다. 





1962년 <007 살인번호>로 시리즈의 서막을 연 이후, 007은 그 이후 쏟아져 나온 비슷한 장르영화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짜릿한 첩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톰 크루즈를 앞세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외에도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 등 탄탄한 마니아층을 자랑하는 첩보물이 어느덧 007 자리를 위협한지 오래다. 여기에 영국 전통 첩보물을 21세기 첨단 B급 감성으로 재치있게 변형시킨 <킹스맨>, <스파이>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볼만한 첩보영화들이 즐비한 요즘, 단지 63년의 긴 역사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007 시리즈>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다행히도, <007 시리즈>는 첩보 영화 홍수 속에서도 007 시리즈가 계속 존재해야하는 이유, 즉 여타 첩보 영화와 다른 007 시리즈만의 매력을 차별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심에 철저히 마초감성으로 중무중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있었다. 우선 그는 제임스 본드하면 자동 연상되는 ‘느끼함’과 다소 거리가 멀다. 탄탄한 구릿빛 근육질 몸매가 빚어낸 환상적인 수트핏이 그가 가진 어떤 무기보다도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그의 섹시는 투박하면서도 단정하다. 그래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007 특유의 느끼함을 꺼려하던 사람들도 007 시리즈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외에도 007 시리즈를 다시 재평가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007 스카이폴>에 이어 <007 스펙터> 메가폰을 잡은 샘 멘데스 감독이다. <아메리칸 뷰티>(1999)로 연출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연출은 <007 스카이폴>이 처음이었던 샘 멘데스 감독에게,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카지노 로얄>을 통해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등장했을 때만큼 우려가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샘 멘데스 감독은 비평, 흥행 모두 성공한 <007 스카이폴>을 안착시키며,  007 시리즈의 부활을 만천하에 선포한다. 


<007 스카이폴> 이후 샘 멘데스와 다니엘 크레이그의 두번째 만남이라는 점에서, <007 스펙터>는 개봉 전부터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아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007 스펙터>는 <007 스카이폴>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영화다. 끊임없이 제기 되는 MI6 존폐위기설, 더 이상 제임스 본드처럼 올드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첩보원은 필요 없다는 반응까지. 제임스 본드는 차라리 예전처럼 소련 첩보원과 목숨걸고 싸우는 것이 더 속 편할 정도로,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해야하는 힘든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 때 제임스 본드처럼 MI6에 충성 했지만,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실바(하비에르 하르뎀 분)의 등장을 계기로, 제임스 본드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던 <007 스카이폴>과 다르게 <007 스펙터>의 제임스 본드는 MI6 소속 첩보원으로서의 회의감, MI6에 대한 불신 등을 모두 깔끔하게 거둔 상태다. 


그래서 그런지, <007 스펙터>는 <007 스카이폴>과 비교해볼 때, 한층 단조로워진 플롯과 명확해진 선악구분법을 보여 준다. 캐릭터 구성만 보더라도, <007 스펙터>에는 처음부터 제임스 본드의 조력자거나 그에 맞서는 적대자만 등장할 뿐이다. 호시탐탐 MI6를 노리는 C(앤드류 스콧 분)이 나름의 반전을 보여 준다고 하나, 첫 등장부터 지극히 예상 가능의 범주의 변화만 보여줄 뿐이다. 사상 최강의 악당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악역으로 등장하는 한스 오브하우저(크리스토프 왈츠 분)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전의 악당들과는 달리, 전세계 정보 통신망을 쥐고 흔들며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한스는 당연히 물리적 힘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대신 그는 제임스 본드는 물론 MI6까지도 통째로 쥐락펴락하는 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예전 육탄전을 벌일 때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막강한 안타고니스트이다. 


하지만 한스가 몇몇 관객들 사이에서 역대 최악의 악당이라는 비이냥까지 받게된 것은 그가 가진 힘의 부족때문만은 아니다. <007 스카이폴>의 실바는 조직에게 버림받은 이후 악당이 된 캐릭터다. 비록 그의 복수방식을 정당화 시켜서는 안되겠지만, 뼛속까지 사무친 실바의 원한은 매일매일 정리해고의 위험과 마주해야하는 수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 충분했다. 그런데 한스가 악당이 되기까지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하지만, 태생부터 나쁜 놈이었던 케케묵은 구식 악당들과 어떠한 차별점을 보여주지 못했다.(<바스터즈:거친 녀석들>(2009), <장고:분노의 추적자>(2013), <빅아이즈>(2014)  등으로 연기파 배우로 입지를 굳히는 중인 크리스토프 왈츠의 뛰어난 연기력이 굉장히 아까운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007 시리즈가 쌓아올린 명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문구처럼 <007 스펙터>는 죽은자들이 활개를 치는 영화다. 그 죽은 자는 한스 오버하우저처럼 서류상에는 사망처리 되어있는 인물일 수도 있고, 계속 제임스 본드의 머릿 속에서 맴도는 유령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아니면, 007, 제임스 본드 자체가 죽은 자가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언제나 찬란한 영광과 비극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역사였다. 제임스 본드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임무를 완수해내는 최고의 첩보원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유일하게 사랑하던 베스퍼 그린(에바 그린 분)을 잃었고, 유일하게 전적으로 신뢰했던 M(주디 덴치 분)도 이제 본드 곁을 떠나고 없다.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수면 위로 끄집어 내며, 자신의 악함을 정당화시키는 한스 오버하우저와 다르게,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흑역사를 쿨하게 인정한다. 제임스 본드에게 중요한 것은 그간 007이 이룩한 거룩한 업적도 아니요, 임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죄책감도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는 그저 자신이 살고있는 지금,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되, 다시는 그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순간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것. 죽은자를 재조명 함으로써 부족한 신념을 재확인하고자하며, 그에 따라 이미 죽은자가 그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살아 돌아오는(?) 분위기가 횡행하는 요즘.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제임스 본드식 위기 대처방법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확실히 <007 스펙터> 속 제임스 본드는 예전에 비해 한층 노련하고 007 선배들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내는 여유가 엿보였다. 





많은 팬들의 바람에도 불구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 차기작을 맡을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다니엘 크레이그가 계속 007로 활약하던, 그렇지 않던 제임스 본드, 그리고 <007 시리즈>는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007 스카이폴>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한들, 시리즈 지속에 대한 확신을 재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007 스펙터>는 다니엘 크레이그 없이도 계속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가야하는 007 시리즈에게 새로운 기대와 숙제를 동시에 남긴다. 부디, 차기작도 007 시리즈에 걸맞는 멋진 제임스 본드 영화로 돌아와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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