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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한국영화 버팀목 되어주던 부산국제영화제가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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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4년 째 영화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진수. 어느 날 조감독 시절 만난 건달전문 단역 배우 태욱이 찾아와 우리도 영화인이니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자고 제안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태욱의 강권에 못 이겨 부산으로 향한 진수. 하지만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한 그들의 부산 여행은 계속 꼬여만 간다. 


Episode 2. 친구들과 함께 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병헌씨. 하지만 투자 단계에서 계속 엎어지는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병헌씨와 친구들은 그래도 영화인이니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 간다. 부산에서 강형철 감독도 보고 배우 강소라도 만나게 되지만, 변변한 대표작이 없는 그들의 부산국제영화제 탐방기는 씁쓸한 굴욕으로 마무리 짓는다. 


Episode 3. 배우로서 선택받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한탄 하면서, 시나리오 한 편 써보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던 상석은 나홀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관객들에게 열띤 환호를 받는 감독과 배우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상석은 근처 모텔에 들어가 다방 레지를 붙잡고 허세를 부린다.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는 각각 <슈퍼스타>(2012), <힘내세요, 병헌씨>(2012),<그들이 죽었다>(2014)에 등장한 장면 중 하나다. 영화 감독을 꿈꾸는 청춘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부산을 방문한다. 자신의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 못보던 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을 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내세울 만한 대표작은 없지만, 영화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자신의 영화가 상영 되었으면 하는 꿈을 안고 부산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는다. 





대한민국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외에도 많은 영화제가 있다. 하지만 영화 속 감독 지망생들은 오직 부산만 찾는다. 사실 영화 감독을 꿈꾸는 이들은 부산 외에도 전주, 부천 등 국내에 있는 여러 국제영화제를 찾는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유독 부산에만 가는 예비 감독들이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영화계에 있어 부산이 주는 상징성 때문이다. 


올해 (정상적으로 열린다면) 21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이다. 1996년 처음으로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적으로 자리 매김한 이후에 부천국제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국내 최초로 시작하기도 했지만,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영화제이기도 하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편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한국과 아시아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래밍이 정평이 나있다. 그래서 전세계 영화계 종사자들과 감독들에게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인정을 받아왔고, 20회를 맞은 지난해에는 허우 샤오시엔, 레오스 카락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아장커 등 거장들이 연이어 부산을 찾았다. 


그런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해처럼 수많은 국내외 영화인들이 바쁜 스케줄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한 걸음 달려와줄지 의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 3대 영화제로 알려진 칸,베니스,베를린 국제영화제와 긴밀한 협업관계를 맺고 있고, 그 외 수많은 해외 영화 관계자들에게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두터운 신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제 시작부터 임기가 만료된 지난 26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와 동거동락해왔던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노력이 컸다. 전양준 운영위원장,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기획하고 창설한 초창기 멤버 였던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징과 같았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국 내 국제영화제 존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젊은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터를 잡고 활동하던 부산에 영화제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문화관료를 역임한 김동호 현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을 초빙하여 결국 1996년 영화제를 여는데 성공을 거둔다. 


영화제 운영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 기획부터 운영까지 영화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서 진행해야했던 이들의 계획은 무모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부산시는 물론 영화계 내부에서도 영화제에 대한 인식이 전무 했기 때문에, 부산시로부터 3억원을 지원받은 영화제 1회의 출발은 조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했지만, 점점 창대해진 부산국제영화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실상부 부산의 자랑 거리다. 그런데 이제는 안정화 단계에 접어 들었다고 생각할 때 쯤, 올해로 21살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어쩌면 당분간 영화제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할 것 같다는 최대 위기에 도사리고 있다. 


발단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시는 영화제 상영목록에 올라온 <다이빙벨>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영화제 측은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해치는 간섭’이라며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부산시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싼 강도높은 감사가 이어졌고, 결국 부산시는 지난해 말 감사원 감사 결과를 토대로,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25일에 있던 정기총회에서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끝내 재 위촉 되지 못했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고발 소식을 알려진 이후, 국내외 영화인들은 일제히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운동에 나섰다.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이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이용관을 지지하는 서명을 발표했고, 허우 샤오시엔, 레오스 카락스, 차이밍량,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등 거장들도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최근 박찬욱, 최동훈 감독, 배우 하정우, 유지태 등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 새로운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류승완 감독은 지난 25일 있었던 ‘2016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호소한 바 있다. 


최근 영화계 안팎에서는 이용관 집행위원장 없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보이콧 하겠다는 움직임도 심상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이미 많은 것이 무너져버린 부산국제영화제로 인한 손실은 국내 모든 영화인들에게 해당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신진 영화인들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연예인들의 레드카펫으로 더 유명한 부산국제영화제 이지만, 수많은 젊은 영화인 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들의 영화적 역량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무대다. 부산을 통해 수많은 젊은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전세계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박정범 감독도 그랬고,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오멸 감독의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을 비롯 수많은 영화제의 상을 휩쓴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의 첫 시작도 부산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었기에 한국영화가 2000년대 초반 비약적인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발굴, 소개하여 좋은 평가를 얻은 작품들이 그 이후 열리는 해외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되고, 소기의 성과를 얻은 것은 작품 자체가 가진 힘이 가장 크겠지만, 그만큼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신뢰의 방증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아시아 신진 감독의 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하는데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해오던 영화제이다.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감독들이 대거 부산국제영화제 지지서명을 표명한 것 또한 이와 같다. 국내외 영화인들이 앞다투어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운동에 나선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영화라는 예술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덕목인 ‘표현의 자유’를 사수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적, 소재를 불문하고 오직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상영을 결정하는 부산국제영화제 특유의 뚝심 프로그래밍에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영화제 초창기부터 조직을 이끌어온 전문성있는 집행위원장 이용관이 있었다. 그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갖추어야할 폭넓은 네트워크도 있었고, 재정확보 능력, 영화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다. 그만큼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난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부산시가 원하지 않는 영화를 상영한것이 발단이 되어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시 당국이 원하지 않는 영화를 틀었다는 이유로 집행위원장이 해임되는 영화제에 어떤 영화인이 자신이 만든 영화를 틀고 싶을까. 부산국제영화제를 연예인들의 레드 카펫으로 유명한 행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전처럼 연예인들이 많이 오면 최근 몇 달 동안 흔들린 영화제의 위상이 회복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가 연예인들도 앞다투어 찾는 중요한 영화 축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와 영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영화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좋은 영화들이 있었고, 언젠가 자신들의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그 날을 기약하며, 힘차게 달리는 영화인들의 꿈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제 전문성과 독립성은 물론 표현의 자유까지 송두리째 흔들리고 위협받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처한 현실이 답답하면서도 슬프다. 


단순히 부산국제영화제 하나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인으로서 꿈을 키웠고, 언젠가 자신의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되는 그 날을 학수고대하며, 묵묵히 영화인의 길을 걷고있던 사람들에게 부산은 한국 영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만큼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창설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한국영화를 위해서 향후 부산국제영화제가 겪게될 일들을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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