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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토니 에드만’ 털복숭이 탈을 쓴 아버지가 가져온 딸의 놀라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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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열린 제 69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토니 에드만>은 지난 한해 가장 뜨거웠던 영화로 꼽힌다. 영화 미학적으로 굉장히 참신한 무언가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딸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지극히 평범한 가족 드라마가 전세계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과 씨네필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엄연히 말하면 <토니 에드만>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평범한 가족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토니 에드만>에 등장 하는 아버지 빈프린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 분)는 괴짜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음악을 가르치는 빈프린트는 남을 웃기는 행위를 유달리 좋아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는 노인이다. 반면, 그의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 분)는 역시 흔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일에 파묻혀 사는 유능한 커리어우먼이다.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M&A 컨설팅을 담당하는 이네스는 매일 살얼음판을 겪고 있다. 행여나 이네스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녀가 속한 컨설팅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이네스가 힘들게 쌓아온 커리어 또한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어떻게든 회사, 엄연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빈틈없이 달려온 이네스의 삶의 별안간 불청객 아버지가 떡하니 나타난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 딸 이네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너무 바빠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여유조차 없는 딸은 아버지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며 거리를 둔다. 어지간한 아버지같으면 자식의 일에 방해된다고 알아서 피해줄 건데, 오히려 빈프린트는 ‘토니 에드만’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변장하여 딸의 생활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곤경에 빠트린다. 




보통의 한국 관객들에게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영화다. <토니 에드만>을 만들었던 독일에서도 흔하지 않는 이야기니까 많은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겠지만, 대한민국 일반 국민 정서로 비추어봤을 때는 아버지와 자식의 캐릭터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것 같은 이 영화를 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주간 영화 평론지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토니 에드만>을 ‘68세대 리버럴한 아버지와 신 자유시대를 살고 있는 엘리트 딸의 웃픈 줄다리기’로 해석한다. 만약 이 영화에서 사회구조적인 요인을 찾고 싶다면, 이보다 더 명쾌하고 통렬한 해석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김혜리 기자의 평대로 <토니 에드만>에 등장 하는 아버지는 1960년대말 프랑스, 독일 등에서 번졌던 ‘68운동’의 가치를 여전히 몸소 실천하고 있는 진보주의자이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보다, 이웃과 더불어 인간 답게 사는 삶을 추구한다. 부인과 이혼한 이후 줄곧 혼자 살고 있지만, 복지제도가 잘 구축된 독일 시민인 덕분에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는 빈프린트는 자신의 풍요로운 시간을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데 사용하고자 한다. 


반면, M&A 전문 컨설턴트로서 총성만 없는 기업들간 인수합병전쟁 한 복판에 서있는 딸 이네스는 진보적인 삶을 살아온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네스에게 있어 수백명에 가까운 공장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싹둑 잘라내는 행위는 늘상 있는 다반사라서, 그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지 오래다. 그렇다고 이네스가 태생부터 타인을 착취하여 이득을 얻고자 했던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로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에 괴로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힘들게 올라온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기 않기에, 살기 위해 이네스는 다국적 기업의 개발도상국 노동자 착취에 협력하는 선봉장에 서게 되었다. 




<토니 에드만>은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딸을 두고 어떤 삶이 더 옳고 그른지 섣불리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도 하에 섣부른 봉합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치닿을 쯤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폭발한 이네스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돈,성공 등 세속적인 욕망을 쫓는 대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쫓는 삶으로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을 빗나간, 그럼에도 그 어떤 극적인 결말보다 수긍이 가는 끝맺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 빈프린트와 딸 이네스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서먹해졌는지는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를 따라 불가리아인들이 거주하는 가정집에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부르게된 고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Everybody's searching for a hero. (중략) I never found anyone who fullfilled my needs. A lonely place to be and so I learned to depend on me’ 

(사람들은 영웅이 필요한가봐요. (중략) 난 아직 내 바람을 채워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외로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의지해 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러야했던 이네스는 어느순간 노래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Greatest Love of  All’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이네스는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택했고, 자연스레 아버지와 딸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든 실패를 하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네스는 그녀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누가봐도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네스의 삶은 공허함에 가득차 있다. 아버지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홀연이 나타나 이네스의 인생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잘 버텨나가는데만 충실했다. 하지만 기괴하다 못해 때로는 부끄럽게 여겨지는 아버지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완벽하고 빈틈없이 견고했던 이네스의 삶이 서서히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성공한 여성 컨설턴트로 포장된 가식과 허울에서 오는 피로감을 인식한 이네스는 결국 대형사고를 터트린다. 모두다 이네스의 대형사고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그런 이네스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불가리아 털복숭이 탈 쿠케리를 쓰고 나타난 아버지 빈프린트다. 


딸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일깨워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임무는 거기서 끝난다. 그 이후의 딸 이네스의 인생은 온전히 그녀의 믿음과 선택에 달려있다.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 딸은 우스꽝스러운 기행을 좋아하는 아버지에 맞추고자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아버지와 딸은 잘 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각자 살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 빈프린트는 자신과는 분명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딸 이네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만이 옳고, 너도 나처럼 살아야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유쾌한 방식으로 딸의 숨막히는 일상에 균열을 내며, 딸 스스로가 세상을 좀 더 즐겁게 사는 법을 터득하길 바랐다. 그리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한층 자유로워진 딸의 변화를 목도한 아버지는 홀연이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간다. 



<토니 에드만>은 사사건건 충돌하는 아버지와 딸의 극적 화해와 봉합을 통해 억지 감동을 조장하지 않는다.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효율’과 ‘합리성’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몰인간성 속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삶을 고민하게 한다. 이 영화가 전 세계 씨네필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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