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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국가에 대한 예의(2017)'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돌아본 국가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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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사건’을 지난 12일 열린 4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 폐막작 <국가에 대한 예의>(2017)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의 기자는 너무나도 어렸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최근 몇 년 간 재심이 진행되었던 사건이라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가 되었고 기자도 분명 그 사건을 접했을 텐데, <국가에 대한 예의>를 통해서야 해당 사건을 정확히 인지하게 되었다. 





권경원 감독의 <국가에 대한 예의>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된 노태우 정권의 실체는 충격 그 자체 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던 고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와 경찰의 시신 탈취 소동은 2016년 개봉한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2014)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종종 찾아가는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전경들의 참혹한 시위대 탄압이 있었고 그 와중에 당시 성균관대에 재학 중이던 김귀정 학생이 숨진 것은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시위대 탄압 도중 김귀정이 사망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장소가 충무로 대한극장 앞이라는 사실은 <국가에 대한 예의>를 통해 알았다. 


강기훈은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의 죽음 이후 한 달 동안 이어진 수많은 청춘 열사들의 분신을 방조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었다. 경찰의 무리한 시위대 탄압으로 숨진 김귀정 사건이 그러했듯이 1987년 민주 항쟁 이후 1991년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민주 열사의 죽음은 국가 폭력에서 기이한 구조적 비극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이 모든 책임을 희생자들이 속해있던 운동권에 전가하고자 했다.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이 분신 자살을 한 이후에는 그가 남긴 유서의 필체가 김기설 본인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전민련 동료 였던 강기훈을 유서 대필 혐의로 지목해 구속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강기훈은 이듬해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 강기훈은 비로소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강기훈의 무죄가 드러나는 동안 그는 몸과 마음에 큰 병을 얻게 되었으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의사의 권고에 따라 하찮고 시시해보이는 취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래서 기타 연주를 시작했고,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는다. 그렇게 그는 ‘국가 폭력의 대표적 피해자’ 강기훈에서 강기타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었다. 


1985년생인 기자도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비로소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사건을 자세히 알 정도로,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해당 사건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훈과 더불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노태우 정권에 저항했다 쓰러진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까지 잊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이켜 주어 담을 수 없다. 때로는 자신을 괴롭힌 기억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기 보다 잊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과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죽음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국가에 대한 예의>는 점점 잊혀져가는 민주 열사들의 죽음을 상기하는 동시에 그들의 희생에 예의를 표하는 영화다. 영화가 다시 불러들인 열사들의 이름을, 그들의 존재를 몰랐던 나같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지하게 해주었다는 것만으로 <국가에 대한 예의>는 영화로서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현재 간암 투병 중인 강기훈은 2015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당시 강기훈을 유서대필자로 지목 했던 검찰과 수사당사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국가에 대한 예의>를 통해 강기훈 사건을 접하면서, 문득 최승호 감독의 <자백>(2016)에서도 다뤄진 바 있는 유우성 간첩조작사건이 생각났다. 검찰과 국정원. 조작 당사자가 다른 사건이긴 하지만 두 사건 모두 국가에 의해 벌어진 조작 사건이며, 대표적인 국가 폭력 피해 사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수사기관에서 일어났던 대표적인 조작 사건에는 대부분 김기춘이 연루되어 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도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김기춘의 작품이다. 




현재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공범으로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김기춘은 최근 자신이 주도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포함 자신이 연루된 그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과 하길 거부한다. <자백>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김기춘은 언제나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의혹을 일축하고자 한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타인을 죽음 이상 고통에 몰아 넣는 행위를 밥 먹듯이 했던 이들은 너무나도 빨리, 쉽게 자신들이 벌인 지난 일을 잘 잊는 것 같다. 


잊지 않는 것.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 하는 것. 그것이 자신들의 과오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 같다. 하지만 뻔뻔함으로 중무중한 그들에게 지난날의 책임을 묻기 이전에, 기자 자신의 지난 날부터 돌아보고자 한다. 결국 더 나은 나를 만들려면 내가 과거 벌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시작으로 1991년에 일어났던 국가 폭력의 실체를 돌아보고자 하는 <국가에 대한 예의>가 겨냥하는 화살은 결국 현재, 지금이다. 강기훈, 그리고 기꺼이 인터뷰에 참여했던 열사들의 지인들은 모두 지난 일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자기 자신 및 가족, 동료들이 겪은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함은 개인적인 억울함을 풀기 위함 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겪은 국가 폭력이 앞으로 또다른 누군가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커보인다. 그래서 강기훈은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도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사과를 받고자 한다. 이제 그들이 강기훈의 추궁에 대답할 차례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및 제4회 사람사는세상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 되었던 권경원 감독의 <국가에 대한 예의>는 오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리는 43회 서울독립영화제 기간 중에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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