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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판타스틱 우먼' 세상의 편견과 혐오에 맞선 아름다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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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하는 마리나(다니엘라 베가 분)의 생일은 완벽했다. 마리나의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 분)는 마리나를 위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고, 이과수 폭포 여행권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난 후, 오를란도가 갑자기 원인모를 통증을 호소한다. 마리나는 급히 오를란도를 병원에 옮겼지만 사랑하는 남자는 곧 숨을 거둔다. 




한국에서도 개봉 되었던 <글로리아>(2013)를 연출한 세바스찬 렐리오의 <판타스틱 우먼>(2017)의 주인공은 트렌스젠더 여성이다. 마리나는 아직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았고 법적인 이름 또한 남자로 살았을 때 이름 그대로이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생각하고 주변인 또한 마리나를 여성으로 받아들인다. 연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평온한 삶을 유지하던 마리나는 오를란도의 죽음 이후 그녀의 삶에 급격한 균열이 생긴다. 마리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오를란도 가족과 경찰로부터 용의자 취급을 받은 데 이어, 오를란도의 가족들은 마리나에게 연인의 죽음을 슬퍼할 애도의 시간마저 주지 않으려고 한다. 


오를란도 가족들이 마리나에게 박하게 대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보인다. 마리나를 만나기 전, 오를란도는 부인이 있었고 자식이 있었다. 오를란도의 가족에게 마리나는 행복했던 가정을 파괴하는데 일조한 존재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리나는 그녀의 남다른 정체성 때문에 연인의 가족에게 모멸감을 받고 곤경에 처해진 것 같다.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을 버린 것보다 이상한 존재를 사랑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부끄러움. 그래서 오를란도의 가족들은 마리나의 존재를 황급히 지우고자 한다. 





그러나 오를란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 또한 애도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마리나는 트렌스젠더라는 이유로 장례식장 출입도 막는 오를란도 가족들의 편견과 혐오에 맞선다. 그렇게 마리나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인정받고 그녀가 응당 가져가야할 것 또한 받아낸다. 남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행동들도 마리나는 일종의 투쟁과 시위를 벌어야만 비로소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일찍이 <글로리아>를 통해 여성들의 삶과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은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은 <판타스틱 우먼>으로 “현대 사회와 여성의 심리를 날카롭게 꿰뚫었다.”는 평을 받으며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우수한 LGBT 영화에게 주어지는 테디상 포함 3관왕을 수상 했고, 올해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칠레 최초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화에 참여한 제작진과 배우의 면모도 화려하다.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을 맡은 <재키>(2016)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칠레 출신 감독 파블로 라라인이 <판타스틱 우먼> 제작을 맡았고, 마리나 역을 맡은 다니엘라 베가는 칠레 최초 트랜스 젠더 배우다. 이외에도 파블로 라라인의 <네루다>(2016)에서 네루다 역을 맡아 깊이있는 연기를 선사한 루이스 그네코가 오를란도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마리나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오를란도 동생 가보 역을 맡았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칠레 영화 최고의 드림팀이 뭉친 외적인 요소보다 돋보이는 것은 영화의 면면이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데 이어, 오를란도 살인 용의자로 몰려 곤경에 처하는 마리나의 감정선을 따라 진행되는 <판타스틱 우먼>은 마리나의 황폐해진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강풍씬 부터 마리나가 거리에 우연히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장면 등 감각적인 인상을 남기는 장면 연출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죽을 만큼의 고통이 날 더욱 강하게 만들어.” (영화 <판타스틱 우먼> 중)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궁지에 몰린 트렌스젠더 여성의 상실감을 섬세하게 그려낸 <판타스틱 우먼>은 연인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삶의 의지를 피력 하며 자신에 대한 편견과 핍박에 당당히 맞서는 마리나의 모습을 통해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꿋꿋이 지켜내는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마리나의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마리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통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편견과 혐오에 맞서며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마리나. 그녀는 진정 크고 밝고 충만한 판타스틱 우먼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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