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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천일의 약속>의 예고되었던 시한폭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굳건히 이어오던 집안의 화합을 위해서 그리고 노향기(정유미 분)과 몇 번 잠자리를 함께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서 사랑하는 이서연(수애 분)과 헤어지고 부모님의 강요대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진행하는가 싶었던 박지형(김래원 분)은 결국 향기에게 파혼이라는 폭탄 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향기에게는 좋아하지만 사랑은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를 주장하긴 했지만, 분명 지형이 파혼을 선언한 계기는 다름아닌 서연의 알츠하이머 병 때문이었습니다. 서연은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랑하는 여자로서 이래저래 신경쓰는 지형에게 "착한 남자인 척 그만하고 꺼져"라고 외쳤지만 지형은 조용히 꺼지기는 커녕 되레 약혼녀와 결혼포기까지 선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지형만 바라보고, 일주일 뒤 결혼해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향기의 충격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로 곱게 자라 세상물정 잘 모르는 순진한 여성입니다. 게다가 지형과 초밥을 먹는데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분들을 생각해서 초밥2인분을 포장해서 갈 정도로 심성이 곱기도 하고요. 아마 보통 남자들 같으면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자신만을 바라보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자는 대로 그대로 따라주는 향기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보듬아주고 싶을 것입니다.
허나 지형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향기와는 달리 향기가 아닌 다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향기와 향기 엄마(이미숙)과의 대화 내용처럼 향기를 너무 사랑해서 그녀가 아닌 매춘부들과 잠자리를 가진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지형의 마음 속에는 향기는 없었습니다. 16살 친구 장재민(이상우 분) 집에 찾아갔다 운명처럼 맞딱뜨린 서연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반해버렸습니다. 비록 그동안 그녀에게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비추지도 못했고, 유학을 떠나는 등 서연의 소식조차 모르는 날들이 더 많았지만 지형의 머릿 속에는 서연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우연처럼 한 미술관에서 서연을 만나던 날. 그 때 지형은 이미 향기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고, 서로 만나서는 안될 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결혼을 안했기에 불륜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파트너가 있는 상대방을 범하는 못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보자마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서게된 지형과 서연은 1년 뒤면 깨질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뜨거운 밀애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지형이 좋아하는 여자는 향기가 아니라 서연이었습니다. 향기는 그냥 귀여워하는 아는 동생이자 결혼을 밀어붙이는 부모님대문에 어쩔수 없이 결혼하는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향기는 그것도 모르고 지난 1년동안 자신을 멀리하던 지형이 하자는 대로 다 해줬습니다. 신혼여행을 미루는 것도, 양가 친척집에 인사를 안가는 것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과 제대로 만나주지 않는 야속한 지형 오빠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니까 사랑하니까 다 이해해줄 수도 있었죠. 그러니 "널 사랑하지 않아. 결혼하지 말자"는 지형오빠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 입덧으로 예상되기까지하는 먹은 것을 다 토해낼 만도 합니다.
당연히 파혼 소식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그 와중에서도 자기가 먼저 결혼을 깨자 했다면서, 죽어도 지형을 감싸주는 향기를 보고 향기 엄마(이미숙 분)의 분노는 치밀어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지형은 자신의 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고 앞서 결혼을 깨트리자고 한바탕 난리치기도 한 향기 엄마입니다. 극중에서 향기 엄마는 딸에 그렇게 관심이 없는 설정으로 등장하지만, 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 엄마들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엄마의 직감은 무섭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평소 히스테리성 조울성 성향을 보인 향기 엄마의 의심이라고 하지만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직 향기네 집은 자신의 딸이 결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비참하게 파혼을 당한 이유가 서연때문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지형이가 향기에게 단순히 오랫동안 익숙해져와서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라고 파혼 사유를 알렸거든요. 하지만 곧 서연의 존재를 알게될 것이고, 파혼 소식에 화가 치밀어올라 자신의 딸까지 손지검하는 향기 엄마는 분명 서연을 찾아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흔들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파혼을 알리는 아들 지형에게 "그 놈의 사랑타령 좀 그만해" 라면서 가부장적인 권한으로 결혼을 강요하는 지형 아버지(임채무 분) 또한 그간 드라마에 나왔던 시어머니들을 대신해서 서연에게 아주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겠죠.
어렵게 자랐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터온 서연이 지형을 사랑하지만 그를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도 이미 약혼녀가 있는 남자 자신을 짓밟히면서까지 사랑의 결말을 얻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하지만 지형은 자신이 서연을 가지기 위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서연의 탓으로 돌립니다.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당당하기보다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지형을 얻기 위해 향기엄마나 자신의 아빠로부터 물세례를 받아가면서 자신에게 매달렸으면 서연에게 왔을 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형은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이 서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기까지는 결코 자신이 가진 풍족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입장을 뒤바꾸어 서연이라면 지형이 자신이 알아서 부모님의 반대에 불구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약혼녀와 정리하고 자기가 먼저 자신과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 앞설겁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을 좋아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를 원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히 끝을 맺을 줄도 모르는 전형적인 우유부단의 패턴을 보이는 지형과 같은 남자는 아주 찌질하게 보일 뿐입니다.
허나 지형의 상황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지형은 향기가 아닌 서연을 택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이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마냥 사랑타령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란 철저히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결혼은 개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더 나아가 집안 간의 결속입니다. 그래서 지형 처럼 잘 사는 집안일 수록 각 집안 어른들의 이해관계타산에 따라 마음에 맞지않는 상대방과 결혼을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또한 사랑을 택하면 집안에서 축출당하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됩니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회사 실장님 자리를 박차고 예쁘기만하고 별볼일 없는 여주인공을 택하는 엄친아들은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아닌 현실을 택하고자하는 지형의 모습이 가장 현실의 남자들과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형과 비참하게 헤어진 이후 수애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다고하나, 불과 30이 채 안되는 나이에 그간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그동안 차마 용기가 없어서 서연의 곁으로 정착할 수 없었던 지형의 마음을 돌려놓습니다. 그러자니 그간 늘 항상 제3자로 머물러있던 드라마 서브여주인공과는 다르게 보듬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더욱더 마음이 쓰이는 향기가 걱정입니다. 한평생 지형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향기가 갑작스레 지형에게 차이고, 또 그동안 지형의 마음 속에는 자기가 아니라 웬 딴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순간 향기가 느끼는 배신감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래서 이 드라마는 30도 안되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도, 지형에게 예고도 없이 차인 향기도, 그리고 그렇게 두 여자에게 모진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드라마 역사상 가장 찌질한 주인공(?) 지형도 안타깝습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형을 볼 때마다 여성시청자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긴 하지만 딱히 지형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막상 저 입장이 되면 어떨까, 과연 내가 가진 모든 풍족함을 다 거부하고 진작에 용기있게 서연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과연 역대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사상 최강 찌질이(?) 남주로 등극한 지형은 어떤 식으로 점점 희미한 기억조차 잃어가는 서연을 지켜주고 상처받은 향기를 보듬아주면서 자신이 자초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네요. 이대로 계속 여성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으면 가뜩이나 구설수를 안고 드라마를 시작하게된 김래원의 입장만 난처해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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