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윤제문 분)은 양반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간을 백정 가리온으로 몸을 숨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와중에 천민으로서 양반들에게 몸을 낮춰야했고, 양반들의 횡포에 억울하게 죽을 뻔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정으로서 양반들로부터 온갖 무시를 받고 살아왔을 법한 정기준은 세종 이도(한석규 분)이 만들고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자마자 무조건 새 글을 막아야한다고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도 양반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백정 가리온으로 위장하였던 정기준인터라 내심 글을 몰라 고통받아왔던 백성들의 삶을 잘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하는 것도 결국은 모든 백성들이 아무 걱정없이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구사하기 위해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뿌리깊은 나무>에서 주인공 세종과 맞서는 정기준은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에 비해서 뭔가 다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기준은 말 그대로 ‘사대부를 위한, 사대부에 의한’ 재상 총재제를 원했을 뿐입니다. 물론 ‘재상 중심제’를 통해 몇몇 사대부만 권력을 독점한다고 해도, 백성들이 글을 모른다고 해도 백성들이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기준 옆에 모여든 사대부들은 사대부로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 자신들의 사대부의 지위와 당장의 사리사욕부터 챙기기 바쁜 탐욕스러운 자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동안 밀본 조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세종 이도에게 붙어 권력을 유지하던 이신적(안석환 분)이 다시 밀본에게 붙은 것은 오로지 권력욕 때문입니다. 단순히히 정기준에게 붙는 차원이 아니라, 밀본의 새로운 수장이 되어 재상 자리를 꿰차 더 많은 권세와 부를 누리고 싶은게 이신적의 야욕입니다. 이신적이나 심종수(한상진 분)이나 백성들의 삶보다 자신들이 당장 날 세금절약과 재정비축에만 관심을 두는 듯 합니다. 이런 이들이 권력을 잡는다 해도, 이도가 지배했던 조선만큼 태평성대를 구축할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백성들의 삶만 피폐해질 것 같은 걱정만 앞설 뿐입니다.
정기준의 백부 삼봉 정도전이 ‘재상’중심의 조선을 원했던 이유는 왕 중심 지배체제보다 훨씬 더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철학’에 의해서입니다. 비록 사대부 내에서 찾아야한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왕실에서만 지도자감을 찾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똑똑한 인재를 발굴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삼봉 정도전 선생은 '언로를 틔워 백성의 소리를 들으라" 라고 할 정도로 그 당시 사대부 기준에는 천하기 짝이 없는 백성들의 민심을 귀기울여 듣고자 하였습니다. 세종 이도(한석규 분)이 백정 가리온으로 변장한 정기준과 함께 정도전 그리고 정기준이 밀본 조직원들을 불러놓고 비밀 회동을 하던 바위에 앉아서 술 한잔 주면서 "(한글창제야 말로) 정도전 선생의 대의에 가장 부합되는 일이라는 것도 새 글을 만들면 보다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맥락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백부의 뜻을 받들여 밀본 삼대 수장 자리에 앉은 정기준은 ‘사대부 중심 국가’를 만들고자하는 목표는 있었으나, 백성들의 소리를 귀기울이라는 백부의 진정한 국가 철학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사대부 권력이 흔들릴 것을 위험해서 백성들이 글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기준입니다. 새 글을 통해서 백성들의 말로서 더욱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소리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자하는 정기준입니다.
도대체 정기준은 백정으로 살면서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을까요? 정기준 또한 조말생(이재용 분)에 의해 남사철 살해 시도 용의자로 내몰렸을 당시 힘없는 백성들은 양반의 한 마디에 처참하게 죽어야한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 뿐이었습니다. 정령 정기준이 글을 몰라서 백성들이 지배층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 힘을 쏟아야겠지요. 허나 정기준은 오직 한글로 인한 지배층의 혼돈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백정으로 양반들에게 괄시당하면서도, 양반들의 지위 강화에만 더 큰 관심을 두고, '사대부 중심 나라'만 상상하고 있던 정기준입니다.
수 십년 동안 백정으로 살아왔지만, 진짜 백정의 마음이 되지는 못한 정기준은 선거철에만 점퍼 차림으로 시장을 돌아다니고, 상인들과 약수를 하고 국밥을 먹는 정치인을 보는 듯 합니다. 말로는 백성들 가장 가까이서 그들의 삶을 체험했다고 하나 진정으로 백성들과 소통을 하려고 하지도,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기준입니다.
물론 정기준 역시 자신이 조선 최고 권력자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밀본을 다시 일으킨 것은 아니겠지요. 그 당시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에게 베푸는 선정이란 오직 백성들의 배만 두둑하게 부르게 하고 전쟁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기에 정기준 역시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없이 무탈하게 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직 탐욕에 눈이 먼 세력들과, 호시탐탐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누리고자하는 명나라를 끼고 정권을 찬탈하려는 정기준이 과연 집권한다해도 세종 이도만큼 정말 조선과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칠 수나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대부 중심 국가를 구현하여 새로운 조선으로 바로잡겠다고 하나, 결국은 기득권의 이익 챙기기에만 몰두했던 밀본과 정기준입니다. 천민의 삶을 경험했으나, 조금이라도 백성들의 편에서 그들이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이상을 품기보다 그 역시도 오직 지배층의 권력보존에만 관심 있는 탐욕스러운 정치인에 불과했습니다. 백성이 똑똑해지고, 많이 알면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야하는 조선의 지배질서가 무너지고 세상에 혼돈만 가득 찬다고 혼비백산한 정기준입니다.
오히려 진심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편에서 '글자'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기라성 대신들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맞짱뜬 사람은 한번도 백정의 삶을 경험하지도, 궁궐 밖에서 살아보지도 않은 왕 '이도' 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군주의 권위와 힘으로 무작정 대신들의 뜻을 강제로 굽히기보다, '논리'와 '열린 소통'으로 대신들을 설득하고자 하였습니다. 세종의 끝장 토론에 한글을 반대했던 신하들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칼보다 글이 더 무섭다는 것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어린 시절 이방원 독재의 부당성을 설파하다가 이도에게 빰맞고 "겨우 폭력이나?" 라면서 일침을 가했던 정기준은 오직 '폭력'으로 이도와 그의 수하의 목을 조르려고 할 뿐입니다. 도대체 정기준은 장차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백정으로 살아 가면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던 걸까요? 가장 낮은 신분에서 천대받는 삶을 살고도 결국은 사대부의 기득권만 챙기기 바빴던 정기준이란 인물에게 너무나도 실망스럽네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만날 입으로는 어렵게 자라, 누구보다 서민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상위 1%의 기득권의 이익만 대변하는 듯한 정치인을 보는 것 같아,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이 단순히 드라마 속 인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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