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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뿌리깊은나무 밀본의 와해를 가져온 정기준의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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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말이다. 이도와 내가 서로 생각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난 이도의 위험천만한 장난을 볼 수 없다. 정치를 하는 자가 백성을 두고 어찌될 지도 모르고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시험을 하다니." 

세종 이도(한석규 분)은 조정에서 "자수하면 밀본을 하나의 붕당으로 인정해줄게."를 제안했습니다. 허나 그 자리에 있던 밀본 핵심 조직원 이신적(안석환 분), 심종수(한상진 분)은 정작 밀본 수장원인 정기준(윤제문 분)에게는 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눈치 하나는 좋은 한가놈(조희봉 분)은 이러다가 밀본이 균열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한가놈도 도담댁(송옥순 분)은 왜 이신적, 심종수가 정기준에게 돌아서버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도 어느 누구보다 정기준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 글을 막는데만 온 힘을 쏟은 나머지 정작 밀본이 무너질 태세이니까요. 

결국 한가놈은 정기준에게 "글자를 막는 것도 중요하다. 허나 그 이전에 조직을 살려야한다."면서 정기준에게 충언을 합니다. 허나 정기준은 결코 글자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밀본이 이대로 해체되고, 설령 이도에 의해서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글자에 대한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백성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 이도의 짖궂은 장난.

사대부가 꽃이고, 사대부가 이 나라의 주류가 되어야한다는 백부 삼봉 선생의 대의를 잇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정적인 이도의 쓸개까지도 핥는 백정 가리온으로 살면서 칼을 갈아온 정기준입니다. 그가 그동안 백정으로서 괄시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살아온 이유는 오직 밀본을 재규합하여 재상총재제를 통해 삼봉 선생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죠. 

하지만 정기준은 어떻게든 밀본 세력을 확장시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도가 만드는 새 글을 막는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간신히 정기준의 세력 밑으로 두었던 우의정 이신적 대감마저 흔들리고 있고, 오랫동안 밀본에 충성을 보였던 심종수마저 해례를 알고 있다면서 다음 본원 자리를 나에게 줘라면서 정기준을 협박할 정도입니다.  

 


이대로 가면 밀본이 와해될 수 있다는 한가놈, 도담댁의 충언에도 정기준이 결코 한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한글의 위력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기준이 한글을 반대하는 것은 새 글이 반포, 유포되면 사대부 중심의 기존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도와의 끝장 토론에서도 잘 나와있지만 백성에게 더 큰 혼란감만 조성하여 잘못된 지도자를 추대해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두가지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한글을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일단 정기준은 공식적으로는 새 글이 백성들에게 책임만 전가하고, 해악이 될 수 있다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진짜 정기준이 앞날의 백성들을 생각해서 한글을 반대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기준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기득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서  계속 국민들을 속이려고만 하고 있거든요. 

어찌되었든 겉으로 드러난 정기준의 한글 반대 이유는 꽤나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단 정기준의 전제는 백성들은 전혀 똑똑하지 않고 어리석다는 것이 깔여있어야 가능합니다. 정기준에게 백성은 그저 어여쁜 존재로 보살펴야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정기준이 봤을 때 백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책임질 능력도 없고 감당할 수 있는 여력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더 큰 책임을 전가하면 오히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게한다는 것이 정기준의 생각입니다. 

그래도 <뿌리깊은 나무> 속 가상인물 정기준은 조선 초라는 시대 상황에 포커스를 맞추면 굉장히 현실적인 지도자입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려고 하고,  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글자를 선사하는 세종이 그 시대에는 나오기 어려운 지나친 이상에 치우친 군주이겠죠.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는 과거를 빌려 현재 21c 대한민국을 말하고자하는 퓨전 사극입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을 21c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군주로 승화시켰고, 있지도 않은 가상인물 정기준을 통해 언뜻 그의 말도 많지만 보는 시청자들의 울화통(?)을 터지게하는 라이벌을 대치시켜 놓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정기준은 사대부 기득권을 우선시하는 경향은 있지만, 그래도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을 갖추었다해도, <뿌리깊은 나무> 시청자들에게 백성을 무시하고, 알 권리를 방해하는 지도자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나마 정기준은 새 글에 책임지지 못하는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밑의 나머지 밀본 구성원은 오직 조직 그 자체와, 밀본이 추구하는 이상과 '재상총재제'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새 글로 백성이 어떻게되는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오직 지금 당장 그들에게 돌아올 이익부터 계산기 두드리는 소인배들입니다. 그래서 막지도 못할 변화의 물결을 힘겹게 막아내려고 하는 정기준을 도통 이해할 수도 없고, 되레 정기준에게 반기를 듭니다. 

만약 정기준이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밀본이 흔들릴 조짐이 보일 즉시, 한글보다도 조직원들을 우선 다독거리고 단속하는 모습을 보여야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정의가 아닌 소수의 이익과 권력을 쫓아 밀본에 가담한 사람들이 다시 정기준을 따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조직원이 반대하면 그걸 포기하는 대인배다운 풍모를 보여야했습니다. 

허나 정기준은 지나치게 한글 반대에 치우친 나머지, 끝까지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주장에 귀기울지 못했고, 계속 자기 고집만 피우다가 결국은 밀본 수장 자리까지 위협받게 됩니다.  제 아무리 백성을 위해 한글을 반대했다고 하는 정기준이라고 하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조직원들의 신망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역병처럼 퍼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백성들에 의해 퍼지는 한글을 막겠다고 죄없는 거지들까지 죽이고 주모자 나인들을 인질로 잡으면서 오직 한글만 막으면 다 해결되는 양 착각하는 정기준입니다.

정기준이 계속 한글을 막는데 삽질하는 사이, 밀본은 정기준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협박과 억압은 더 큰 반발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의지만 활활 불태우게 일조를 할 뿐입니다. 정기준이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죽이겠다고 발악을 할 수록, 오히려 한글은 더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한글을 막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백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는 커녕 눈가리기 아옹하기에만 급급하고,  소수의 이익만 앞세우는 집단은 자기네들끼리 밥그릇 싸움으로 패망하는 법입니다. 온갖 잔악무도한 위협으로 어떻게해서든지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이도의 눈치만 살살보면서 자기 살길 챙기기만 바쁜 오합지졸로 전락하는 밀본의 와해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오는 21c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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