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출가시키고, 단 둘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 분)과 안느(에마뉘엘 리바 분). 그런데 과거 안느가 가르쳤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실제 유명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가 카메오로 출연했다) 공연을 본 그날 저녁. 안느는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평온했던 두 부부의 일상에 점점 회색빛 어둠이 짙어온다.
칠순을 넘은 나이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안느는 오른쪽 마비로 인해 예전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는 것에 상실감을 감추지 못한다. 남편 조르주가 헌신을 다해 안느를 간호하고, 삶의 의지를 재확인시켜주지만 안느의 상황은 점점 악화될 뿐이다.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영화 <아무르>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키스씬도 없다. 은퇴한 음악가 노부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중간 중간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 외에 그 어떤 음악이 들려지지 않는 것도 이색적이다. 조르주와 안느와 부부의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 분) 등 등장인물 간 서로 나누는 대사와 고통을 호소하는 안느의 비명을 제외하고 서서히 죽음을 맞는 인간과, 그걸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남은 자의 고통을 다룬 영화 <아무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와 정적이다. 어느 가정과 별반 없는 평범하고도 덤덤한 일상 속에 불쑥 찾아오는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는 쓸쓸하면서도 적막한 인간의 흥망성쇠를 정통으로 관통한다.
입원을 원치 않는 아내를 위해 조르주는 그 역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 몸이 편치 않은 아내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준다. 어쩌다 한 번 예술가 특유의 고집을 부리는 아내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끝까지 병든 아내의 곁을 지켜주는 조르주와 같은 남자는 그리 흔치 않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아내에게 깊은 병색이 찾아오고, 주위 친구들도 하나씩 세상을 떠나는 현실. 이제 죽음은 곧 마주치게 될 현실이다. 게다가 점점 노쇠 해져갈 뿐인 안느는 조르주의 정성어린 돌봄에도 불구, 이제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노인의 몸으로 오직 아내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헌신적으로 아내 곁을 지키던 조르주도 서서히 지쳐간다. 더 이상 자신의 의사조차 표현할 수 없는 안느도, 그녀를 무작정 바라봐야하는 조르주도 힘들다. 그래서 조르주는 아내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면서, 그도 편해질 수 있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아무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생에 딱 한번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지만, 나이가 들어 어느덧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시기에도,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두렵고 외롭다. 떠나간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감내해야하는 아픔이 더 클 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르주는 설령 침대에만 누워있는 아내일지라도 그녀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별을 미루고자 한다. 그러나 예정된 운명을 거스를 수도, 좋았던 그 때로 되돌릴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결국 조르주는 자신과 아내에게 다가온 운명에 순응한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으로 말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마비 증세를 겪게 된 안느는 그 때부터 몸과 마음 모두 피폐해지기 시작한다. 한동안 남편의 수발마저 거부한 채 되도록 혼자서 하려고 노력했던 꼿꼿한 정신 또한 말끔히 사라진 채 누군가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원시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남편 조르주는 자기 없이는 물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아내 그 자체를 사랑한다. 그리고 한 때 우아하게 길고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안느의 마지막 남은 숭고함을 지켜주고자 한다. 눈부신 삶의 순간은 잠깐이지만,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마저도 감싸줄 수 있는 ‘사랑’이란 이름의 위대함이 돋보인다.
지난 2009년 <하얀 리본>에 이어 올해 생애 두 번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석권한 올해 70세 거장 미카엘 하네케의 또 하나의 걸작.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어려운 ‘사랑’과 ‘죽음’을 이렇게 진지하고 통찰력 있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이 또 있을까. 아내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조르주의 다소 극단적인 행동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담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명작이다.
한 줄 평: 사랑, 죽음, 그리고 인생. 그 쓸쓸함에 대한 깊고도 숭고한 성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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