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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내 딸 서영이. 이보영-이상윤 자존심보다 강했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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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주말연속극 <내 딸 서영이> 주인공 서영(이보영 분)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못해, 노름에 빠진 아버지 삼재(천호진 분) 때문에 학교도 자퇴해야했고, 자신과 동생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정말로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힘겹게 살았던 서영이에게 자존심은 다 쓰러져가기 일보 직전인 서영이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였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흐트려짐없이 꼿꼿했고 당당했던 서영이의 기품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판사 출신 변호사이자 재벌집 며느리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했던 그녀의 자존심은 때로는 그녀를 가차없이 무너뜨리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가장으로서 책임감,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외면했다는 죄의식,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속였다는 죄책감. 남들은 하나도 짊어지고 힘든 무언가를 그 가녀린 어깨 위에 모두 걸쳐 올리면서도, 서영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표정으로 살아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은 그녀를 볼 때마다, 내세울 게 '자존심' 밖에 없기에 유일한 무기를 내세우는 서영이의 심경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서영이가 답답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저 자존심 좀 내려놓으면 어디 덧나요?




똑부러진 성격의 서영이긴 하지만, 그녀는 어른이 된 이후 남들 앞에 자신의 호불호를 도통 드러내지 않았다. 서영이 또한 사람이기에 좋고 싫음의 감정의 구분은 명확했지만, 언제나 속으로 삭힐 뿐 남에게 심지어 자신의 남편이었던 우재(이상윤 분)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서영이가 여전히 전 남편인 우재를 잊지 못하는 것은, <내 딸 서영이> 시청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영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우재를 떼어놓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우재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우재와 그의 가족을 속인 죄책감이 가장 컸긴 하다. 하지만 서영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감싸줄 것 같았던 우재에게 일종의 강한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서영이가 아버지 삼재 존재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우재는 그날 이후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서영이 앞에 나타난다. 뒤늦게 서영이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된 우재는, 믿었던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상실감도 컸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의 솔직한 해명이 듣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영이는 우재 가족들에게까지 자신의 정체가 들통난 순간까지, 자신이 아버지를 부인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럴싸할 변명조차 들지 않았다. 


분명 서영이에게는 아버지 삼재를 부정할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애초 서영이는 우재와 결혼할 마음조차 없었기에, 어차피 우재네 집에서 반대할 결혼, 아예 고아라고 둘려대자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재네 집은 서영이가 고아라는 점을 다행이라 여기고, 그들의 결혼을 선뜻 승락한다. 세상 모든 여자들의 로망인 재벌가 입성이 눈 앞에 있는데,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복을 마다할 사람은 정말 없다. 그래서 서영이는 눈 딱 감고, 아버지를 산 송장으로 만들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은 천륜을 어겼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당시 서영이와 아버지는 절연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까지 서영이는 아버지라는 그늘 때문에 자신만 힘들고 억울한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날 서영이가 존재하기까지,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주위의 남모를 희생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의 걸림돌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서야 깨달을 때쯤, 아버지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노름에 빠져서 아내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고등학교까지 포기한 딸이 힘겹게 모은 아내의 병원비와 대학 등록금 몫까지 단단히 챙겨갔던 아버지는 "살려달라."는 딸의 절규를 듣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된 지 오래다. 그 날 이후 오직 딸을 위해 마음 단단히 먹은 삼재의 변화를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으련만, 보다 극적인 화해를 보여주고자했던 <내 딸 서영이> 제작진은 삼재가 패혈증으로 들어눕고 나서야 아버지의 하늘같은 깊은 사랑을 알고 후회하는 딸의 눈물을 클로즈업한다.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고질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대개 사람들은 소중한 존재가 자신의 곁을 완전히 떠나고 다시 되돌아오기 힘들 때, 그 부재에 대해 후회하고 힘들어하는 일이 종종 있다. 


우재를 구하려다가 생긴 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복막염으로 번진 패혈증에 쓰러진 삼재와 뒤늦게 후회하는 서영이의 사연에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을 보내는 것은, 딸을 힘겹게 한 지난날을 철저히 반성하며, 딸을 위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자청한 삼재의 변화 덕분이 크다. 지난날 오죽 딸이 등을 돌릴 정도로 그야말로 '막' 살아왔던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 그 과거를 완전히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온 삼재는 아버지를 외면한 딸의 눈물어린 용서를 받을 자격 충분하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뒤늦게라도 아버지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 하려고 했는데, 자칫하다가 아버지가 이대로 눈도 제대로 못뜨고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은 서영이는 그제서야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하기 이른다. 그래서 서영이는 우재네 집을 찾아가 본의 아니게 결혼 과정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정체를 속인 과오를 사죄한다. 


"자꾸 머뭇거리다가 미루면 영영 사과를 못할 것 같아서요."


서영이는 우재도, 자신의 시어머니였던 차여사(김혜옥 분)도, 쌍둥이 동생 상우(박해진 분)도. 그리고 아버지 삼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비록 본의아니게 그들과 적잖은 오해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워 본의 아니게 그들과 헤어져있는 시간을 보내야했지만, 사실 서영이의 마음 속에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고픈 바람이 숨어 있었다. 다만 좋다, 싫다를 말하지 못하는 서영이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그와 다시 화해하고픈 마음이 들 때쯤, 아버지가 쓰러지고 '시간은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절실히 깨닫은 서영은, 드디어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틀을 과감히 깨부수고,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자신의 진심을 선보인다. 그 누구보다도 서영이의 진솔한 사과와 한 마디를 원했던 우재와 우재 가족들, 그리고 서영이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변화다. 


특히나 정말 사랑했지만 서로의 자존심만 앞세우느라 언제나 마음과 달리 내쫓기 급급했던 우재에게 자신이 얼마나 우재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단순 로맨틱함을 넘어, 드디어 자신을 힘겹게 가두었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서영이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순간이었다. 




각자를 단단히 조여매었던 자존심의 허울을 벗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한발자국 앞으로 나간 서영이와 우재의 키스는 아름다웠다. "더 늦기 전에 진심을 담아 사랑한다 말하세요." 어쩌면 서영이와 우재뿐만 아니라, 언제나 마음으로는 되내이면서도, 막상 앞에 서면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최고의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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