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전망대

지슬.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위로하는 아름답고 가슴시린 씻김굿

반응형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다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은 크게 제의적 형식을 띈 4개의 시퀀스로 구성된다. 


첫 번째 시퀀스 ‘신위(영혼을 부른다)’에서는 1948년 11월로 돌아가, 당시 제주섬 안덕면 동광리 근처에 있던 주민들과 군인들까지 모두 현재에 불러온다. 


당시 미군정 하에 제주 섬 해안선 5km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소개령이 내린 터라, 마을 주민들은 일단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 숨어야만 했다. 그렇게 동광리 주변의 무동이왓, 삼밭마을 주민들까지 약 120명 가량이 속칭 ‘큰넓궤’로 알려진 동굴에 숨어든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동굴로 숨긴 했지만, 대부분 마을 주민들은 왜 군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지, 어떤 이유에서 군인들을 피해 몸을 숨겨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 또한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제주 섬 사람들이 왜 빨갱이로 내몰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려내지 않는다. 제주 섬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여기고 총구를 겨눠야하는 다수의 군인들도 윗선의 명령에 충실할 뿐이다. 





두 번째 시퀀스 ‘신묘(영혼이 머무르는 곳)’의 차례에서는 마을 소녀 순덕(강희 분)이 학교에 두고 온 책을 가지러 몰래 마을에 내려가는 동안 군인들에게 포위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허겁지겁 동굴로 피신하긴 했지만, 마을 주민들의 머릿속엔 온통 마을에 두고 온 어머니, 돼지 걱정뿐이다. 곧 있음 닥칠 슬픈 운명의 회오리가 성큼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큰넓궤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 소소한 농담과 얼마 남지 않은 감자를 함께 나누며 동굴 밖을 나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순박한 모습은 비극의 체감을 더욱 극대화 시킨다. 


세 번째 시퀀스 ‘음복(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에서는 영화 속 무동(박순동 분)의 어머니가 군인에게 살해당해 돌아가시면서도 아들 가족을 위해 품었던 지슬(제주도 방언으로 감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영문도 모른 채 춥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내몰린 마을 사람들이 꿋꿋이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의 끈이자 생명의 힘인 지슬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시퀀스 ‘소지’(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에 이르러 영화는 본격적으로 65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당시 이름 없이 억울하게 사라진 영혼들을 위로하며, 여전히 4.3 사건을 잊지 못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서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지슬>은 마냥 슬프고 묵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 폭의 수묵화를 보듯이, 제주 섬 곳곳의 절경과 당시 제주의 운명까지 먹색으로 표현한 <지슬>의 흑백 영상미는 서정적이면서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 드리워지는 순간에도 순박한 웃음과 서로를 향한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그들에게 다가온 비극적 운명을 더욱 아련하게 심화시킨다. 


오멸 감독이 누차 강조했지만, 영화 <지슬>은 선동 영화가 아닌,  4.3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만든 영화고, 여전히 제주 섬 곳곳에 깊숙하게 남아 있는 상처를 위로하고 싶은 오 감독의 진심이 담긴 수작이다.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수년간 공을 들여 준비했다는 <지슬>. 이제 관객들이 이 아름답고도 가슴 시린 씻김굿에 동참할 차례다. 3월 21일 전국 개봉. 


한 줄 평: 아픈 역사를 어루만지는 아름답고 가슴 아픈 씻김굿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