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적한 시골에서 할아버지, 손자 단둘이 오붓하게(?) 살아가는 정겨운 풍경이 있다.
과거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장교 출신 할아버지(이봉규 분)은 말끝마다 '빨갱이'를 외치시는 전형적인 애국 보수 어르신이다. 그런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손자 지훈(차래형 분)은 할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4년동안 머슴처럼 일만 했지만, 암도 이겨낸 불굴의 어버이. 할아버지는 도무지 돌아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죽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지쳐 잠시 서울에 올라오던 중 정체불명 미모의 여인 은주(한은비 분)를 만나게 된 지훈은 술김에 장난삼아 은주에게 할어비를 '복상사' 시켜줄 것을 제의한다. 그런데 의외로 순순히 시골로 내려와 서서히 할아버지를 유혹하는 은주. 그런데 할아버지를 없애기는커녕, 이러다가 은주에게 할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뺏길 위기다.
할아버지 유산을 둘러싼 세대 간의 격돌. 과연 최종 승자는?
전작 <프락치>를 통해 권력과 폭력 앞에 무기력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친 황철민 감독의 신작 <죽지 않아>는 정말로 죽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산을 노리는 20대의 이야기를 통해 점점 보수화 되어가는 현 시대를 웃기면서도 서늘하게 보여준다.
지훈을 비롯한 그의 20대 친구들은 각자 할아버지를 ‘꼰대’라 부르며, 하루 빨리 자신들의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지만, 할아버지들의 경제적 도움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훈과 친구들은 철저히 할아버지 세대에게 기생하면서 살아간다.
물질만능주의에 익숙한 20대들이, 진보적 가치관을 추구하던 아버지 세대와 단절하는 대신 돈 때문에 자신들을 택한 것을 명확히 간파한 할아버지들은 쉽게 손자들이 원하는 유산을 내놓지 않는다.
돈(취업)을 미끼로 손자들의 생각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재단하는데 성공을 거둔 할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물러받고 싶어하는 또다른 여러명의 대결구도를 형성하여, 자신들을 향한 손자 세대의 불만을 젊은 세대 내 갈등으로 돌리는데 성공을 거둔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같은 또래인 은주에게 나름의 연대를 제시한 지훈은 '혼자 살기 위해' 되레 자신을 할아버지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은주의 선택에 격노한다.
자신을 머슴처럼 부려먹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강요했던 할아버지를 겨냥했던 지훈의 방아쇠는, 언젠가는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마저 은주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 하에, 서서히 은주에게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짜여진 각본 하에 의해, 기성세대의 기득권 유지에 저해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제거하는 데 이용당한 지훈은 어쩌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할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썩은 송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물질자본주의에 영속된 나머지, 혹은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에 전념하는 동안 기성세대의 바람대로 점점 보수화되어가는 한국 청춘들의 암울한 현실을 제대로 일깨워주는 영화 <죽지않아>. 전형적인 수미쌍관법식의 전개를 구사하며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영화의 오프닝, 결말이 유달리 우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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