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개봉한 영화 <관상>은 다분히 추석 대목을 겨냥한 영화이다. 요즘 영화계 흐름과 마찬가지로, 전문가 평점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영화 개봉 9일 째 400만을 돌파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관상>은 대중 상업 영화로서는 확실히 성공한 케이스로 남을 듯 하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개봉했고, 사극 영화라는 부분에서 <관상>은 개봉 전 지난 해 천만관객 신화를 수립한 제2의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로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송강호, 김혜수, 백윤식, 이정재, 조정석, 이종석 등의 화려한 캐스팅은 <광해>와 더불어, 지난해 천만 관객을 기록한 <도둑들>의 스타 라인업을 연상시킨다.
믿고 보는 배우들의 총출동, 추석 연휴임에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경쟁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에 있어서 <관상>은 잘 될 수밖에 없던 영화였다. 하지만 엄청난 흥행 속도와 별개로, <관상>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굉장히 재미있었다는 지인들의 이야기와, 스토리 부분이 약했다는 또다른 지인들의 이야기. 하지만 영화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던지 간에, 어느 한 부분을 보는 관점은 대부분 비슷했다. 바로 수양대군으로 출연한 이정재의 연기력이다.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엄연히 말해서 <관상>의 캐릭터들은 기존에 나왔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새롭지도, 독특하지도, 입체감이 있지도 않다. 추석 대목 상업적인 흥행을 고려하여 만든 대중 영화이기 때문에, <관상>은 캐릭터나 시나리오 전개에 있어서 굉장히 안전한 길을 택한 것 같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정해진 운명은 무엇을 해도 바꿀 수 없다는 예정된 결말 하에, 익숙하고 정형화된 캐릭터와 선악구도법 스토리텔링으로 2시간 넘는 러닝타임을 이어나간다. 영화 <건축학개론> 납득이의 사극버전을 연기하는 것 같은 조정석은 감초로서 대중들을 웃겨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고, 기생 연홍으로 출연하는 김혜수는 흡사 <타짜>의 정마담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캐릭터 정형화의 끝판왕은 이정재가 맡은 수양대군이다. 영화 시작 한시간만에 등장하는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나쁜 삼촌이다. 수양대군에 맞서 단종을 지키는 호랑이 상 김종서(백윤식 분)과 달리 이리 상으로 등장하는 수양대군은 얼굴에 깊숙이 배인 상처만큼 절대악으로 등장한다.
등장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밑도 끝도 없이 나쁜 남자인 수양대군은 가장 정형적이고 단순한 악역 캐릭터의 극치를 달린다. 하다 못해, 요즘은 악역에게도 인간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될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유(?)를 조명하는데 반해, <관상> 속 수양대군은 왕 자리에 눈이 뒤집어 어린 조카도 해치려드는 타고난 운명부터가 나쁜 인간일 뿐이다.
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쁜 남자일 뿐인 수양대군을 살려낸 것은 온전히 배우 이정재의 역랑이었다. 도저히 영화 속 수양대군의 캐릭터에는 공감도,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수양대군에게 자꾸 끌린다. 수양대군 캐릭터 자체가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옴므파탈의 결정체인 탓도 있겠다만 이건 캐릭터 본연의 설정보다도,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의 공을 높이 평가해야할 것 같다.
<모래시계>로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 이후, 그동안 <정사>, <태양은 없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등 쉴틈없이 연기 활동을 하였지만 이상하게 이정재는 배우라는 이미지보다, 잘생긴 스타, 모델 이미지에 가까워 보였다. 절친인 정우성과 더불어 연예계를 대표하는, 수려한 외모와 훤칠한 기럭지 탓에 매 작품마다 평균 이상 연기력을 선보였음에도 그 뛰어난 외모에 가려진 이정재는 그렇게 9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 아이콘, 비주얼 스타로 이미지가 굳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송강호, 김혜수, 백윤식 등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명배우들이 총출동한 <관상>에서 이정재는 캐릭터, 연기력, 카리스마 면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배역에 비해 절대 악역으로 등장하는 수양대군 캐릭터가 워낙 '쎈' 덕분도 있겠다만 너무나도 악으로 점철되어서 도저히 인간적인 매력도 공감도 느낄 수 없는 수양대군을 이정재는 나름 설득력있게 그려내었고, 한국 영화 역사상 손꼽히는 옴므파탈 반열에 올려놓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관상>을 보러갔는데, 이정재만 실컷 보고 왔다"는 평처럼 <관상>은 수양대군도 아닌, 배우 이정재의 영화였다. "이정재의 대표작으로 추가."라는 씨네21 이화정 기자의 한줄 평처럼 이정재는 <관상>의 출연으로 20년 남짓 지속해오던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빛내는 대표작을 추가함과 동시에, 그의 이름만으로 믿고 볼 수 있는 연기 잘하는 배우로서 온전히 우뚝서게 되었다.
완벽한 비주얼을 가진 미남 청춘 스타에 안주하기보다, 꾸준히 여러 장르물에 캐릭터 변신까지 마다하지 않은 배우 이정재의 노력이 일구어낸 최고의 반전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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