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응답하라 1988> 쌍문동 골목 5인방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혜리 다음으로 가장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가진 박보검이라고 한들, 이미 김정환(류준열 분)으로 촘촘히 짜여진 듯한 판에 최택(박보검 분)이 끼어들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덕선(혜리 분) 남편으로 향하는 판은 의외로 허술 하면서도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말은 즉슨, 덕선 남편이 정환이가 될 수도 있고, 택이가 될 수 있다는 말. 그렇게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끼리 열심히 싸움 붙어 봤자,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가 그랬듯이, 신원호 & 이우정 작가 마음대로 덕선 남편이 정해지겠지만 말이다.
그 어떤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가족, 이웃간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응답하라 1988>이기에, 정작 덕선의 남편이 누구인지 크게 궁금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하긴 정환이가 덕선 남편이든, 택이가 덕선 남편이든, 어차피 이우정이 만든 허구의 세계 속 인물들일뿐이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가 누구와 결혼을 하던 말던,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아무 의미 없이 다가올 수도 있다. <응답하라 1994>에서 성나정의 남편을 두고 쓰레기나 칠봉이나 피터지게(?) 싸웠지만, 모든 결말이 밝혀진 이후 아련한 추억의 한 켠으로 사라진 것처럼, <응답하라 1988>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응답하라 1988>에는 지난 <응답하라> 시리즈과 다르게 다소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응답하라 1994>의 러브라인을 열렬히 응원 했던 시청자들은 여주인공 성나정의 남편이 자신이 응원하는 남자 주인공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응답하라 1994>는 성나정의 남편으로 쓰레기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칠봉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각축전(?)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응답하라 1994>의 시청자들은 매회 시시각각 움직이는 성나정의 감정에 주목 했고, 그녀가 자신이 응원하는 남자 주인공 곁으로 하루빨리 정착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성나정의 갈팡질팡 마음은 도무지 어디로 튈 지 몰랐고, 성나정의 어장 관리는 드라마가 완전히 끝나는 그 순간까지 멈출 줄 몰랐다.
아마 이번 <응답하라 1988>의 성덕선도 <응답하라 1994>의 성나정이 그랬듯이, 어장 관리의 끝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들의 생각을 밀어 붙이며, 기어코 설득 시키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신원호 & 이우정 콤비니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성덕선의 남편 찾기를 질질 끌고 나가던, 우리 시청자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4> 때와는 달리, <응답하라 1988>의 시청자들은 예전만큼 여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인지 크게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이다. 그렇다고 성덕선을 포함, 김정환, 최택 등 러브라인의 중심 선상에 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흥미를 잃은 것도 아니다. 이제 막 이성에 눈뜬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다만, 여기서 성덕선의 남편이 누구인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 뿐이다.
일찌감치 정환으로 판이 정해져있는 것 같아서, 뒤늦게 최택의 매력에 푹 빠진 시청자들도 '덕선 남편은 정환'이라는 기존의 판에 수긍하고 체념하는 분위기로 가는 듯하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은 유독 "덕선 남편은 정환이지만, 내 마음을 심쿵하게 하는 것은 택이."라는 댓글이 자주 보인다. 사실 내 마음도 그렇다. 분명, 덕선 남편은 정환으로 판세가 기울여져있다고 해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쓰게 하는 이는 최택이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덕선에게도 유독 마음을 쓰게 하는 이는 택이인 것 같다. <응답하라 1988>을 조금이라도 보면 알겠지만, 덕선이는 그냥 철딱서니 없는 평범한 열여덟살 소녀다. 언니 성보라(류혜영 분)과 동생 성노을(최성수 분)에 끼어 눈치밥 제대로 먹는 둘째딸이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슬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덕선이는 아직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이다.
하지만 철없는 덕선이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린 최택을 만나면 사람이 180도 달라져버린다. 마치 내가 아는 성덕선이 아닌 것처럼. 성동일, 이일화에게는 자신들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둘째딸이 최택에게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엄마다.
지난 4일 방영한 대국 에피소드 외에도, 사실 알고보면 덕선은 유독 최택을 살갑게 챙겨왔다. 물론 덕선뿐만 아니라 쌍문동 골목 친구들 모두 최택에게 만큼은 너그럽고, 관대하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한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최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 어떠한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천재 바둑 기사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전세계 바둑판을 재패한 천재 기사라고 한들, 여전히 최택은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한 아이이다. 게다가 최택은 어릴 때부터 오직 바둑에만 온 정신을 쏟는 탓에, 그 외의 일상생활은 또래에 비해서 서툴고 외롭다.
남들처럼 최택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천재 바둑 기사가 아닌,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픈 친구로 생각하는 쌍문동 아이들이기에, 일찌감치 남들의 주목을 받는 생활에 지쳐 더욱 닫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최택이 친구들에게 만큼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 중에서 유일한 여자 아이인 덕선이는 도무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천방지축 말괄량이 소녀이지만, 중간에 끼인 딸로 눈칫밥을 오래 먹은 탓인지 속도 깊고,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줄 포근한 마음을 가진 여자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이러니 제 아무리 돌부처 최택이라고 한들, 덕선을 보는 순간 "예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데 최택만 보면 행동 자체가 180도 달라지는 건, 덕선이뿐만 아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쉬이 내비추지 않는 최택이 덕선과 함께 있는 그 순간 만큼은 박보검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남발하는 탓에, 수많은 여성들이 최택에게서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그저 박보검이 연기하는 최택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알리는 없겠지만, 난 그래도 최택이 좋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최택을 연기하는 박보검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택만 놓고 봐도 평소 잘 웃지도 않는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만큼은 활짝 웃고,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상남자의 박력을 마다할 여자가 누가있을까. 게다가 입가에 살짝 미소만 머금 어도 보는 이의 마음을 '심쿵'하게 하는 박보검 인데 말이다.
덕선이 남편이 누구인지는 어디까지나 신원호 & 이우정 작가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제작진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캐릭터들이 짜여진 각본에 움직이는 드라마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화면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 속에 최택이라는 허구의 캐릭터가 훅 들어왔다는 것 뿐,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응답하라 1988>의 최택의 미소 보는 재미로 이 힘든 세상 그래도 버티게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위안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드라마전망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답하라 1988 10회. 류준열 vs 박보검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 전해라 (6) | 2015.12.06 |
---|---|
응답하라 1988 8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 (5) | 2015.11.29 |
응답하라 1988 7회. 신해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그대에게 (9) | 201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