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박보검 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이창호 9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았던 진정한 돌부처였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린 이후 예전과 달리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다고 하나, 1980년대 후반 당시 소년 이창호는 어릴 때 프로에 입문한 터라, 또래 친구가 많지 않았고, 때문에 자신과 달리 친구가 많은 <응답하라 1988> 최택이 부럽다고 얼마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부모님이 금은방을 운영하시고, 어린 나이에 세계 바둑 무대를 재패 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는 뛰어난 집중력은 이창호 9단과 쏙 빼닮았다고 하나, <응답하라 1988> 최택은 이창호 9단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특히 연애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수를 쉽게 보이지 않는 바둑판과 다르게, 성덕선(혜리 분) 앞에서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자신있게 표출한다. 마침내 최택은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덕선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하필 최택과 마찬가지로 덕선을 짝사랑하는 김정환(류준열 분)도 그 자리에 있었다. 택이도 덕선이를 여자로 좋아한다니. 씁쓸해하는 정환의 표정이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덕선을 여자로 좋아한다."는 최택의 고백을 시작으로, <응답하라 1988>의 최대 하이라이트(?) 덕선이 남편 찾기의 본격적인 서막이 울렸다. 초창기 부터 정환이 덕선이 남편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 탓에, 아무리 최택이 덕선을 향해 돌진한다고 한들, 그래봤자 '덕선이 남편은 정환이' 라는 인식이 팽배 하긴 하지만, 어차피 덕선이 남편이 누구인지는 신원호 & 이우정 마음이다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덕선이를 두고 정환이와 택이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거니 받거니 하는 흐름이 흥미진진할 뿐이다. 뭐 이 또한 가족 이야기, 그리고 이보다 한 술 더 뜬 성보라(류혜영 분)와 선우(고경표 분)의 관계에 시선이 분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응답하라 1994>에서 쓰레기-성나정-칠봉이와 함께 또 다른 러브라인을 형성했던 김성균-조윤진(도희 분)은 빠른 시일 내에,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했고, 그 이후에도 안정적인 사랑을 키워나가며 그들을 지지 했던 수많은 시청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은 그 어떤 사랑도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다행히, 지난 10회분을 시작으로, 보라와 선우가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되었다고 한들, 보라의 남편이 선우로 이어지는 것 까지는 명확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덕선이 남편에 이어 보라 남편까지 찾아야하는 <응답하라 1988>이니까, 이 드라마 속 모든 사랑의 결말은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가 남긴 명언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덕선과 보라의 남편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 맞추겠다는 '의지'만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도대체 남편이 누구야하면서 머리 싸매고 봐야하는 어설픈 추리 놀음이 아니라, 요즘 그 어떤 로코물에서도 효과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심쿵주의보'를 발령하는 로맨스로서 <응답하라 1988>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청춘 남녀의 밀고 당기는 은밀한 감정 전달도 좋지만, 이번 <응답하라 1988>에서는 젊은 여주인공들 남편 찾기보다 중년 배우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는 가족 이야기에 많은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시리즈가 힘들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 지난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폭넓은 반응을 얻게된 것은, 예년보다 더 정교해진 러브라인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간에 펼쳐지는 따뜻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강하게 드러내진 않지만, 은밀하게 전달되는 '시대정신'에 있었다. 그래서 젊은 여주인공 남편 찾기에만 집중한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고, '가족'을 내세우지만 결국 기승전사랑이라는 기존의 공중파 가족드라마와 강한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마저 초창기 내세웠던 '가족'이 점점 흐미해지고, 덕선 & 보라 남편 찾기만 남는다면?. 최택의 팬으로서, 요즘들어 그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족'과 '이웃'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덕선을 감싸안으며, "그럼 내가 남자지 여자냐?"하며 미소 짓는 최택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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