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처럼 귀환하는 트라우마의 전경. 지난 22일 첫 방영한 tvN <시그널>은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거미의 땅>을 떠오르게 한다. 2015년을 살고 있는 박해영(이제훈 분)에게 불연듯 들려온 무전기. 그것은 2000년 이재한(조진웅 분)에게서 온 무전이었다. 지금은 2015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령이 되어버린듯한 이재한은 과거에서 온 무전을 들고 사람들의 문을 두드린다. 2000년 그 당시에도 형사 였던 이재한이 왜 2015년 박해영에게 무전을 보냈던 것일까. 무전은 아무 말이 없다.
<시그널>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15년 전 벌어진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자신에게 호의를 배풀던 김유정의 유괴를 방조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박해영은 자신이 노력해도 바꿔지지 않는 현실을 일찍이 깨닫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이 되었지만, 박해영에게는 경찰이 응당 가져야하는 신념과 직업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뼛속까지 경찰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박해영은 연예인 뒷조사로 소일거리를 하며, 적성에는 맞아 보이지만, 흥미도 잘해보겠다는 의지도 없는 경찰 생활을 근근이 이어나간다.
경찰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가득한 박해영이 왜 굳이 경찰이 되었는지는 아직 지난 22일 방영한 1화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미 어린시절에 공권력의 비리와 무능을 똑똑히 경험한 박해영은 경찰이 피해자 가족들과의 약속과는 다르게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제대로 된 방향으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경찰이 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일원으로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숱한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해영은 아직 경찰을 그만두지 않았다. 경찰에 대한 불신과 체념이 가득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경찰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여전히 경찰의 주위를 뱅뱅 맴도는 것은 아닐까.
SBS <싸인>, <유령> 등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물게 법의학자, 프로 파일러가 미제 사건들을 파헤치는 수사물을 집필해온 김은희 작가의 신작 <시그널>은 흡사 그녀의 전작들을 절묘하게 합쳐놓은 것 같다. 거기에 과거와 현재가 무전기로 교류하는 상황은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동감>(2000)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지난날의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는다는 설정은 tvN <나인>(2013)을 생각나게 한다. 정통 수사물을 표방 하면서도, 페이스 오프(<유령>), 과거에서 온 무전기(<시그널>) 등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김은희 작가표 수사물은 더 이상 새롭거나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그널>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데 있다. 15년 전 각인된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박해영과 차수현(김해수 분)의 분절된 기억을 따라 2000년과 2015년을 배회하는 이야기는 2000년에서 온 이재한의 무전을 계기로 조각난 퍼즐들을 하나씩 꿰어 맞춰 나간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으니, 15년이 지난 후에라도 제대로 해결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보낸 무전. 하지만 정작 2015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15년 전으로부터 온 무전에 쉽게 응답 하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지금 들추어 봤자, 그닥 유쾌한 기억도 아니요, 결코 공개되면 안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어떻게든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잊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자, 그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진실이 알려지지 않기 위해 전면으로 나선다. 대개 이런 경우, 그들의 바람대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아무리 유령이 과거에서 온 무전을 들고, 사람들의 문을 두드린다고 한들, 정작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항상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며, 쉴틈없이 괴롭혀 왔지만, 그 상처와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해결할 의지도 용기도 없는 대개의 사람들은 늘상 피하기 일쑤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정체의 근원이 뭔지도 모른채,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시름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매일 불연듯 떠오르는 환영과 고통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기보다 피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던 박해영의 지난날의 삶도 보통 사람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해영은 그런 자신을 두고 이렇게 항변했다. 나도 할 만큼 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맞는 말이다. 그는 김유정을 납치한 진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매일같이 경찰서를 들락 나락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결국 어린 박해영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꿔지지 않는 현실에 분개 했고, 그 결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가득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변변한 직장 구하기 힘들다는 또래들과 달리, 경찰대를 나와 어린 나이에 경위 계급장을 단 상위 1%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나, 별다른 꿈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릴없이 연예인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낙으로 여기는 이 청년은 놀랍게도 15년 전에서 온 간절한 외침에 자기 스스로를 가두어 놓았던 트라우마를 박차고 나와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있는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던 이재한의 바람과 어느 순간 가슴 한 켠에 밀려나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이 헛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헬조선’이라 부르며, 체념과 자조로 일관하던 한 청년의 자각몽. 그간 자신의 일에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도 않았고, 잘못 했다 간 잃을 것이 더 많아보이는 엘리트 경찰이 갑자기 공권력의 모순과 정면으로 맞서는 정의의 사도로 탈바꿈하는 설정 자체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박해영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반가운 것은 그가 보여준 행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하고도, 취해야할 자세이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몰두 했던 인간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다는 스토리는 2015년 한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극적 설정 이었고, 그들의 올바른 변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도 극장 안에서만 머무를 뿐,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시그널> 또한 2015년 영화 속에서만 맴 돌았던 정의 실현처럼 15년 전 이재한에게서 온 무전을 계기로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오직 드라마에서만 배회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과거만 응답 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도 표류 중인 장기미제사건, 공권력의 모순에서 비롯된 사회 부조리 등 우리가 살면서 겪었던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는 이 드라마가 tvN <응답하라 1988>이 거둔 절반의 시청률이라도 보여줄지도 미지수다.
그래도 tvN <미생>의 김원석PD의 섬세한 연출과 탄탄한 스토리,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첫 회에 대한 반응은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영화같은 드라마로 불리는 이 드라마의 진가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유령들의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시작된 시그널. 이 드라마가 종영하는 그날까지, 그 믿음을 끝까지 가지고 같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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