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전망대

깨어난 침묵. 강요된 침묵을 깨는 카메라의 힘

반응형

얼마 전까지 부산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 곳에서 부산 대표 막걸리라고 불리는 ‘생탁’을 알게 되었고, 방송인 왕종근을 모델로 기용한 ‘좋은 친구 생탁’이라는 버스 광고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서울로 돌아온 나는 지난 16일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독립영화 쇼케이스를 통해 박배일 감독의 신작 <깨어난 침묵>을 보게 되었다. 생탁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생탁이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았던 터라, 왕종근이 선전하는 막걸리가 그 생탁이었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생탁’은 부산에서는 꽤 유명한 막걸리다. 과거 부산 지역 곳곳에서 막걸리를 제조하던 업체들이 모여만든 부산합동양조에서 제조하고 있고, 이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종업원 100명 남짓에 사장이 무려 40명이나 되는 기형적인 조직도를 가지고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지역 업체이지만, 노동조건이나 직원처우는 열악 했던 부산합동양조 직원들은 2014년 초, 힘을 모아,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노조를 만든 직원들에 대한 회사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노조 가입 직원들에 대한 사측의 협박과 회유가 계속 이어졌으며, 40명 이상의 직원이 가입했던 노조는 15명 안팎으로 대폭 축소된다. 그 사이 어용노조를 만든 사측은 원래 있던 노조를 불법 단체로 몰아세우며 그 어떤 대화와 타협도 거절하고 있다. 


생탁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지 50일이 지난 이후, 언론들이 이 사안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박배일 감독은 생탁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30분짜리 속보영화 제작을 계획한다. 하지만 박 감독의 예상과 달리, 영화는 2016년 봄이 되어서야 80분 남짓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깨어난 침묵>으로 완성되었고, 영화 속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업무 현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카메라를 조용히 응시하는 생탁 노동자들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함께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흘러나오는 <깨어난 침묵>의 오프닝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분리된 편집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 영화는 실험적인 미학적 성취도 이루는데 성공을 거둔다. 영상을 전부 흑백 처리한 것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힘은 어느 누구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투쟁 현장에 대한 기록에 있다. 


<깨어난 침묵>에서 활용된 푸티지의 60%는 생탁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영상으로 이뤄져있으며, 박배일 감독과 오지필름이 찍은 영상은 40%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밀양 아리랑>(2014) 편집 때문에 온전히 생탁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던 이유가 컸지만, 생탁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영상은 제3자의 시선의 개입없이도 현장에 있는 당사자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한다. 


<깨어난 침묵>이 제13회 서울환경영화제를 통해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공개 되고, 얼마 전에 개최된 제16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에서 한국 최고구애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음에도 불구, 생탁 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를 배회하고 있고, 왕종근을 앞세운 생탁 버스 광고는 부산 전역을 쌩쌩 돌아다니고 있다. 노동자들이 긴 침묵을 뚫고 용기 내어  자신의 권리를 외칠 수록, 침묵을 강요하는 세상은 그들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킨다. 


30년 전에도, 어쩌면 30년 이후에도 동시대 이야기가 될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은 불투명 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강요된 침묵에서 깨어나고자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인 것 같다. 그래서 <깨어난 침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침묵을 지키길 원하는 세상이 등을 돌릴지라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 현장을 고스란히 기록하고자하는 카메라들의 건투를 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