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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그림자들의 섬. 사람으로 살기 위해 써내려가는 현재진행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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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이 한국조선공사로 불리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에게 영도에 위치한 조선소는 꿈이고 희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조선소로 몰려든 청년들은 열심히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노동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작업현장에서 소리소문도 없이 죽어나갔지만, 사측은 이를 산업재해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조선소 노동자들은 안전한 근무환경과 적정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저항을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의 시작이었다. 


80년대부터 한진중공업 내에 있었던 노조의 시작과 투쟁 역사를 다룬 <그림자들의 섬>에 전면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재까지 사측에 복직을 요구하며 길고 긴 싸움을 이어나가는 해고 노동자들이다. 2010년 한진중공업 내 있었던 대규모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다시 회사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해고 노동자들의 입을 빌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어진 ‘한진중공업 사태’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수차례 있었음을 주시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한국조선공사 당시 제작한 기록물부터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사진까지 증거자료로 활용한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 다니던 기록의 조각들은 <그림자들의 섬>을 통해 1987년에도, 2003년에도, 2011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도돌이표 역사의 효과적인 증언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림자처럼 잊혀졌던 이름들을 차례차례 소환한다. 


1987년, 처절한 노동환경과 연이은 동료들의 죽음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한국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자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 사이 회사명이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었고, 근무 환경도 예전보다 조금 나아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1990년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 이었던 박창수가 의문사를 당했고, 2003년에는 김주익 당시 노조위원장이 사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크레인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김주익의 자살에 고통스러워하던 곽재규도 그의 곁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9년 뒤, 사측의 손배가압류에 힘들어하던 해고노동자 최강서 씨가, 동료들의 노조 복귀를 호소하며, 세상을 등지는 일도 있었다. 




수십년 동안 지리멸렬하게 이어져온 노조 탄압 역사 앞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마냥 무기력하게 거리에 내몰리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서 끝까지 싸웠고, 지금도 그들의 싸움은 계속 진행중이다. 2011년에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대량 해고에 반발해,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로 올라가 309일간 농성을 벌인 바 있다. 2003년, 85호 크레인에서 투쟁한 김주익은 홀로 싸우다,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2011년에는 김진숙의 투쟁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여든 ‘희망버스’가 있었다. 


비록 김진숙 지도위원이 원하는 '해고노동자 전원 복직’이라는 완전한 해피엔딩을 맞을 수는 없었지만, 희망버스 시민들이 보여준 응원과 격려 덕분에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고, 현재 그녀는 노동자 전체 권익 향상을 위해 크레인 아래에서 길고 긴 저항을 이어나가고 있다. 




여전히 2011년 사측으로부터 정리해고 당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복직은 묘연하고, 현재 대다수의 조선업계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그림자들의 섬>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섣불리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함께라면 가능한 희망. 그림자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써내려가는 위대한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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