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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후쿠시마 내 사랑. 상처를 기억하기 그리고 치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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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할 결혼식날. 약혼자에게 파혼당한 마리(로잘리 토머스 분)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일본 후쿠시마로 도망치듯 떠나온다. 클라운즈 포 헬프(Clowns4Help)라는 자선단체와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 생존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한 마리는 얼마 되지 않아, 마술 등의 공연으로 후쿠시마 재난민들을 위로하는 일에 재능이 없음을 알게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하지만 마리는 도쿄로 돌아가기 않고, 임시보호소에 있다가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 사토미(모모이 카오리 분)과 함께 지내기로 한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FoFF 2017에서만 상영한, 도리스 되리에 감독의 <후쿠시마 내 사랑>(2016)은 제목에서 느껴지다 시피, 고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1959)를 오마주한 영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의 배경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 일대이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요근래 일본 대중 문화예술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극적 소재이다.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등장한 가까운 예로, 일본에서 1500만명 관객을 동원하고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2016)이 있고, <아주 긴 변명>(2016) 같은 경우에는 영화에서 지진, 후쿠시마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작 소설을 집필하고 영화 연출까지 맡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주 긴 변명>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후쿠시마 내 사랑> 같은 경우에는 일본 출신 감독이 아닌 독일 감독이 요근래 일본에서 있었던 가장 비극적인 재난을 영화로 다루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실연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자기보다 더 큰 아픔을 겪은 인물과 함께 우정을 쌓으며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 <후쿠시마 내 사랑>의 기본 내러티브 자체는 신선하거나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와 사토미 두 여자의 트라우마 극복기를 다룬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왔다면, 비단 후쿠시마라는 배경 덕분만은 아니다. 


마리가 우여곡절 함께 지내게된 사토미는 게이샤로 자신이 살던 집에 쓰나미가 몰려오던 당시 제자 유키와 함께 나무 위로 대피 하던 중 유키를 밀쳐 그녀를 죽이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모두가 만류하는데도 극구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간 사토미와 그녀를 따라 사토미 집에 머물게된 마리는 매일 밤 유키를 포함해서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귀신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매일밤 유키의 노래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도 자신이 지은 업보라고 생각해서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토미는 그 집을 떠나지 않는다.


예상대로 마리는 사토미와 함께 지내면서, 실연의 상처를 조금씩 회복한다. 하지만 상처를 극복한 것은 마리 뿐만이 아니다. 사토미 또한 마리에게 의지하면서, 때로는 마리의 따뜻한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쓰나미 이후 잃어버렸던 삶의 의지를 되찾기 시작한다. 영화는 마리가 겪은 상처가 사토미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단정 짓지 않는다. 설령 애인에게 차인 충격이 재난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보다 그 강도가 약할 지 언정, 마리가 겪었던 일련의 상처들도 그녀를 종종 주저앉게 만든다. 


매일밤 귀신이 보인다는 마리의 하소연에 사토미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응수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토미 또한 매일밤 유키의 환영에 시달린다. 행복하지 않아 귀신이 보이는 여자들은 서로가 가진 아픔을 공유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멀리 보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하지만 마리와 사토미는 자신들을 힘들게 한 과거를 완전히 지우는 대신, 상처를 기억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고자 한다. 


사토미에게 게이샤 수업을 받기 위해 새로운 제자가 집으로 온 날, 마리는 죽은 유키가 매일 밤 앉아있었고, 사토미가 자살시도를 했던 나무의 가지를 베고 홀연히 후쿠시마를 떠난다. 사토미가 목을 메었던 가지 하나만 자르고 사연 많은 나무 자체는 그대로 남긴 마리의 행동은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기억이 남을 것 같다. 도쿄에 간 마리는 다시 원래 살던 독일로 돌아갈 것이고, 그 곳에서 옛 약혼자를 만날 지도 모른다. 후회와 고통, 자괴감으로 점철된 마리의 인생이 후쿠시마, 그리고 사토미 덕분에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조차 쉽게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마리는 지난날 받았던 상처 위에 새로운 삶을 올리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악몽을 기억하면서,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상처투성이 인생들을 조심스레 위로하는 따뜻하고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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