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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구르는 돌처럼(2018)' 무용가 남정호로 바라본 내려놓기, 나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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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 대한민국 최고의 현대무용가, 명망있는 대학교수로 살아온 남정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정년퇴임을 반년 앞두고 청소년 직업 체험 센터 하자센터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다. 이전에도 남정호 무용가는 하자센터 청소년들과 함께 현대무용 마스터클래스를 꾸준히 진행해왔지만, 퇴임을 앞둔 2017년 하자센터 수업은 남정호에게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겨준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한국장편경쟁 수상작 <구르는 돌처럼>(2018)은 남정호가 하자센터 청소년들과 함께 진행한 열흘간의 마스터클래스 일정을 기반으로, 수십년간 무용가로 살아온 남정호의 발자취와 교수 퇴임을 앞둔 심경, 워크숍에 참여한 하자센터 학생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인터뷰와 공연 연습 장면 등으로 녹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수십년 이상 최고의 무용가로 각광받으며 또래 여성들에 비해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지만, 그녀 또한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서울올림픽이 한창 열리던 1988년, 무용가, 선생, 딸, 아내, 엄마 등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에 짓누름을 느낀 남정호는 자신이 걸친 거추장스런 옷들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다시 그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는 자전적 무용극 <자화상>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남정호는 퇴임을 앞둔 나이든 무용가의 심경을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구르는 돌처럼)의 가사에 빗대어 하자센터 학생들과 즉흥 무용극 협업에 임한다. 30년 전 남정호는 역할 부담감에 벗어던진 옷들을 다시 주워 입었지만, 2017년 남정호의 분신 격으로 ‘구르는 돌처럼’ 즉흥극에 참여한 20대 초반 여성 고다는 자신이 걸친 화려한 옷들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흔쾌히 던져준다. 


남정호의 자전적 경험이 집약된 퍼포먼스 공연이라고 하나, 즉흥 무용극 <구르는 돌처럼>은 남정호 뿐만 아니라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사회에 자신만의 첫 발을 디뎌야하는 하자센터 학생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란 여학생 남정호는 늘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유독 많은 제약을 받는 여자인 것이 싫었다. 남정호가 춤을 사랑하게 된 것도, 춤을 추는 그 순간 만큼은 자유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무용을 하기 위해 엄한 부모님, 학교와 타협하며 제도권 내 엘리트 예술가로 성장한 60대 남정호와 제도권 교육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는 10-20대 하자센터 학생들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정호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방식을 그녀의 자식들보다 더 어린 나이의 학생에게 강요하기 보다, 학생들의 눈높이 맞춰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한다. 남정호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구르는 돌처럼>이 교수 퇴임을 앞두고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을 내려놓기 싫어하는 60대 기득권의 꼰대극이 아닌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현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그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내려놓을 줄도 아는 남정호의 성숙한 삶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수십년 동안 한국 무용계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남정호는 자신이 그간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고 싶지 않음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내려놓고 싶지 않아 했고, 이로 인해 생긴 대립과 갈등, 불화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혼돈에 빠트렸다. 하지만 남정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녀의 아들보다 더 어린 학생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서서히 내려놓기 시작했다. 




한예종 무용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남정호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현대무용가 이며, 자신이 수십년 동안 성찰하고 터득한 삶의 지혜를 현 시대 청년들에게 전달해주며 용기를 북돋우는 최고의 여성 교육자이자 선생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나눌 줄 아는 노년의 여성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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