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와 마주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세상의 많고 많은 피아노 중에서도 사카모토는 유독 쓰나미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후쿠시마의 피아노에 애정을 보인다. 인간의 손에 의해 조율 당하는 보통의 피아노들과 달리,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내는 소리는 그 자신이 겪은 역경과 고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14일 국내개봉한 <류이치 사카모토:코다>는 애초 사카모토 류이치의 반핵, 환경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로 시작되었다. 실제로 영화 초반은 초기 기획의도를 여실히 드러내듯,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 일대를 돌아다니며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카모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2014년 사카모토가 인후암 판정을 받으면서, 영화는 애초 계획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암 투병으로 난생 처음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은 사카모토의 세계관도 달라 지게 된다. 1978년 일렉트로팝 선구자로 평가받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로 데뷔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적 기반은 키보드와 전자음악이다.
전세계적으로 일렉트로팝 돌풍을 일으켰던 YMO 활동 덕분에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주연으로 발탁된 사카모토는 영화의 주제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만들며, 영화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사카모토가 조연과 음악을 담당했던 <마지막 황제>(1987)는 세계적인 영화음악감독으로 위상을 드높인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암 투병으로 한동안 음악 활동을 쉬었던 사카모토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OST 작업을 맡으며 활동의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사카모토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만큼, 죽음의 위기를 겪은 남자가 가족을 죽인 사람을 향해 복수를 감행하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업은 그에게 남다른 감정을 안겨준다.
과거 사카모토는 기존 악기와 전자음악의 협업 위주로 작업을 해왔다면, 현재의 그는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소리, 노이즈까지 아우루는 음악세계를 지향한다. 그의 변화에 단초를 제공한 이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인데, 사카모토의 평에 의하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감독이지만 물, 바람, 발자국 등 일상의 소리까지 사운드로 녹여낸 뛰어난 음악가 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사운드에서 영감을 얻은 사카모토는 ‘가공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라는 컨셉으로 타르코프스키 감독처럼 자연, 사물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음악을 만든다.
사카모토에게 OST 작업을 맡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자>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악기와 전자음을 활용한 단순한 음악보다 소리를 쌓아올린 영화 음악을 주문했다. 다소 파격적이고 난해한 작업 방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카모토는 이를 자신의 음악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회로 받아들인다. 예전과 달리 부썩 노쇠 해진 사카모토는 그의 몸과 마음에 생긴 변화를 덤덤히 수용하고 인정한다. 예전의 사카모토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구상되어 연주된 멜로디만을 음악으로 생각했지만, 최근의 사카모토는 평소 그가 귀 기울이지 않았던 자연, 주변의 소리를 기반으로 만든 음악을 만든다.
오래전부터 평화,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했던 사카모토는 일상, 조형물,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소리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나간다. 사카모토의 음악에는 동시대의 아픔이 베어 있었고, 기도문을 암송하며 음표를 그렸던 바흐의 ‘코랄 전주곡’처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마음으로 곡을 만든다.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위기를 예술관으로 확장시킨 사카모토 류이치. 시대에 조응하고 변화를 기회로 만드는 거장의 품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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