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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물속에서 숨쉬는 법(2017)' 모든 존재는 상호적으로 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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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족이 있다. 대구의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반장으로 일하는 현태(장준휘)는 인사과장 준석(오동민)으로부터 직원 한 명을 권고 사직 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하루종일 괴로움에 신음한다. 현태의 아들 영준(김현빈)은 난독증 판정을 받게되고 현태의 아내 지숙(조시내 분)의 시름은 깊어져간다.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는 준석의 무관심과 독박육아에 점점 지쳐간다. 




대구에서 제작된 독립장편영화, 고현석 감독의 <물 속에서 숨쉬는 법>(2017)은 물 속에서 숨쉬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견뎌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연 아닌 필연같은 지나침 속에 현태와 준석의 가족들은 서로를 마주치게 되고, 이들의 엇갈린 만남은 각자의 비극으로 수렴된다. 


박성원 작가의 단편 소설 <하루>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는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의 하루를 담은 원작에서 5명의 인물이 하루동안 겪게 되는 일들을 비선형적으로 풀어낸다. 한 인물에 집중하기 보다 여러 인물들을 수평적으로 배치하고 교차하는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는데, 흡사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2000),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의 전개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친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인물들이 취한 행동과 대사가 다른 장면에서 반복되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출근길에 은혜에게 전화를 걸어 은행에 가서 전세금을 빨리 내라고 독촉하는 준석의 대사는 통증을 홀로 감내해야하는 은혜의 관점에서 재조명된다. 이런 식으로 등장 인물들이 입으로 뱉은 말과 행동들은 메아리처럼 영화 곳곳을 맴돌며 끔찍한 결말로 귀결된다. 




비극적인 엔딩을 완성하기 위해 극중 모든 상황들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인물들이 취한 말과 제스처는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취하는 사소한 행동들이다. 상부의 지시로 인원 감축 대상 직원들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역할을 맡은 준석은 말문을 꺼내기 앞서 잠시 머뭇거리긴 하지만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준석에게는 현태와 같은 작업반장들 에게 권고 사직 지시를 내리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준석은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산후우울증에 걸린 은혜와 아이를 방관한다. 준석에게 권고 사직 지시를 받고 혼자 끙끙 앓던 현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사고를 당한다. 


이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일에 충실히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신들의 일에 치인 나머지 도움이 필요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유 없이 쳇바퀴처럼 정신없이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야하는 사람들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주변과 타인을 챙기지 못해 일을 그릇되게 만들었다고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물 속에서 숨쉬는 법>에서 드러난 슬프고도 끔찍한 결말은 누구의 특별한 잘못도 아니요, 책임도 아니다. 현태와 준석 두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누구 하나의 희생과 책임으로 쉽게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리해고가 만연한 사회,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독박육아,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이들을 위한 사회 보호망이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는 현실. 하지만 몇몇 개인만의 노력으로 아예 해결될 과제가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화는 현실에 대한 날센 비판을 세우는 대신,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난 이후 비로소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을 찬찬히 들어보게 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어쩌면 영화의 강력한 모티브가 되었을 불교의 연기론(인과설)은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으로 이뤄진 모든 존재는 상호적인 관계임을 강조한다. 나는 내 삶의 인이지만, 누군가의 삶에는 연이될 수 있다. 모든 문제는 직접적으로 ‘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하나, ‘나’를 둘러싼 주변과 상황, 즉 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나 혼자 잘한다고 모든게 순탄하고 원만하게 풀리는 것도 아니요, 주변 상황 또한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준석이 일찍이 은혜의 심각한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녀의 고통을 나누었다면, 누군가가 권고 사직 지시로 고민하는 현태의 짐을 함께 고민했다면 최악의 결말은 막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준석에게 계속 전세금 독촉을 요구하는 집주인, 회사 사정을 이유로 빠른 정리해고를 요구하는 회사의 방침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효율성과 생산성만 추구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타인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비극적인 일을 겪게 되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화 못지 않게 비극적인 현실을 살고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 다 물 속에서 어떻게 숨쉬어야할지 모른 채 열심히 버티기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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